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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1000명의 딸들, 평범하게 크는게 제 소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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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남자친구들이 쉼터에 올 수 없습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모란역 인근 나 홀로 아파트 주차장 한구석에 나 있는 입구. 이곳에 빨간색 글씨의 경고문이 붙어 있다. 입구를 따라 올라가면 '성남시단기청소년쉼터'가 나온다. 이 쉼터에서 여자 가출 청소년 10명이 먹고 자고 공부하고 있다.

청소년 10명의 '엄마'를 자처한 김은녕 성남시단기청소년쉼터 소장을 지난 10일 쉼터에서 만났다. 인터뷰할 때 그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19년 동안 여자 가출 청소년 1000여 명을 돌보며 체화된 습관이었다.

"남자친구들은 쉼터에 올 수 없다는 안내문요? 쉼터 주변에서 남자친구가 발각되면 퇴소 조치한다고 경고해요. 가출 청소년 남녀 커플이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아파트 민원이 끊이지 않아서요. 그래도 2009년 아파트에 터를 잡은 이후 주민들이 우리 아이들을 점점 이해해주는 것 같아요."

이 쉼터가 '경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출 청소년 눈높이에 최대한 맞추려는 모습이다. 하루 5개비 흡연과 주 1회 외박을 허용하고 있다. 김 소장은 "흡연은 가출 청소년의 증상이다. 이보다 어른한테 상처받은 본질을 치유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외박을 허용하는 것도 자유로운 가출 청소년에게 맞춰 쉼터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다.

김 소장이 여자 가출 청소년을 품은 이유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로 봤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대학생 때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시자 삶과 신앙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그는 목사가 됐고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부터 집이 없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1999년 월세방에서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를 시작했다.

"외환위기 때 가정이 해체되거나 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이들이 많아져 청소년 쉼터가 많이 필요했어요. 지금은 그룹홈 2곳(새날우리집·봄이네집)과 쉼터 3곳(중장기쉼터·일시쉼터·단기쉼터)을 운영하고 있어요. 15세에 만난 아이들이 벌써 30세가 훌쩍 넘은 엄마가 됐더라고요."

쉼터를 찾아오는 이들은 저마다 아픈 상처를 갖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엄마의 부재였다. "집이 가난하든 부자이든 아이들에겐 신뢰할 수 있는 성인 1명이 필요해요. 여자 가출 청소년들은 엄마가 없고 아빠 혼자 키운 경우가 많아요. 제가 묵묵히 아이들 옆을 지키며 그 1명이 되고자 해요." 아이들은 쉼터에서 자신을 돌아보고는 낳아준 엄마를 찾고자 한다. 김 소장은 동사무소나 경찰서에 협조를 구해 함께 엄마를 찾아다닌다.

김 소장은 아이들이 평범하게 살아갈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평범함이기 때문이다. "취업하고 쉼터를 후원하겠다고 찾아올 때,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아이를 낳고 잘 살아갈 때 감동받는다"고 말했다.

1000여 명의 엄마로서 김 소장은 교육에서 아이들 개성을 인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실제로 안 해서 그렇지 맘먹고 하면 다들 재주가 정말 많아요. 아이들이 학교 가기를 꺼리면 그 이유를 들어보고 고등학교 자퇴는 괜찮다고 합니다. 대신 일자리를 같이 찾아보죠."

이때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길어야 2~3년이다. "아이들이 시간이 흘러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철이 듭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이 먼저 알더군요. 그때까지 기다려 주는 인내심이 우리 어른들에게 필요할 뿐이에요."

[박윤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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