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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고문한 사람도 용서한 무경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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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지 정대철 전 의원의 회고

대화와 타협 몸소 실천한 정치인

중앙일보

1997년 국민회의 총재 경선에 나선 김상현 당시 지도위의장(왼쪽)과 정대철 부총재.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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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83세로 별세한 후농(後農) 김상현 전 국회의원에겐 또 다른 호가 있었다. 무경(無境).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고인과 함께 동교동계 대표 원로 정치인 중 한 명인 정대철(74) 민주평화당 고문은 19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그 명칭의 연원을 이렇게 회고했다. “후농은 이수성 전 국무총리, 김재기 전 외환은행장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마당발이었다. 친화력이 좋아 주변에 호형호제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다. 그런 후농의 모습을 보고 신경림 시인이 ‘무경’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고인은 박정희 정권 때 ‘유신 반대운동’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잇따라 옥고를 치르고 17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김대중(DJ)·김영삼(YS)과 함께 재야 정치인들의 민주화 운동 단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든 주역이었다. 그러면서도 “민주화를 위해서는 경계가 없다”고 강조했다고 정 고문은 전했다. 그는 고인이 박정희 정권 시절 직접 대통령 면담을 신청해 청와대에서 박 전 대통령과 대면한 일화를 소개했다.

“서슬 퍼런 시절임에도 박 전 대통령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야당도 폭넓게 포용해야 한다. 야당이 왜 민주화 운동을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그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 동지와 후배들에게 ‘적에게도 존경받는 사람이 돼라’고 말하고 다녔다.”

고인은 유신정권 시절 자신을 고문한 사람과도 꾸준히 교류했다고 한다. 정 고문은 “유신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김상현·조윤형·조연하 등 야당 인사들이 줄줄이 잡혀가 고문을 받았다”며 “그 뒤 후농은 자신을 고문한 당사자를 직접 찾아 만나 용서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정권이 시킨 일을 한 것일 뿐, 당신은 잘못이 없다”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고인에겐 ‘정거장’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항상 주변 사람들과 나눠 쓰려고 해서 동료·선·후배들이 “김상현 주머니는 정거장”이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정 고문은 “후농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지들을 만나고 나서는 꼭 ‘차비는 있느냐’ ‘가는 방향이 같으면 내 차를 타고 가라’고 했다. 누구에게든 다정다감하고 인간적인 분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정치 활동과는 별개로 장례식 때 시신을 염(殮)하는 천주교의 한 봉사단체에 10년간 몸담기도 했다.

‘배신’이라는 단어를 유독 싫어했다는 점도 고인을 추억하는 이들의 증언이다. 자신이 정계 입문을 도와줬거나, 과거 자신을 도와주던 사람이 다른 사람·진영으로 떠나면 ‘네 탓’보다는 ‘내 탓’을 했다고 한다. 정 고문은 “누가 찾아와 ‘저 사람이 배신했다’고 하면, ‘그런 말 하지 마라. 내가 부족해서 떠난 거니, 배신한 사람은 오히려 나’라고 꾸짖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인간으로서는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정치인으로서는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인생이었다”고 고인을 애도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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