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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198. 관리가 치세를 못하면 중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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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월드

강화도는 질곡의 우리 역사를 홀로 견딘 곳이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자주 찾는다. 광성보(廣城堡)는 서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병풍처럼 펼쳐지는 절경을 자랑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수많은 백성과 군인이 쓰러져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뒤 몽골과 대접전을 벌이기 위해 해협을 따라 길게 성을 쌓았으며, 1658년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요새가 되었다.

더없이 고요한 광성보. 그러나 내 귀에는 아직도 외세의 공격에 희생된 군인영가들의 비명소리가 생생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광성보의 상황은 처절했다.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 덕진진을 점령한 뒤 광성보로 쳐들어왔으며 어재연 장군 휘하 전 수비군이 끝까지 싸우다 전원 순국하고 만다.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광성보를 걸으며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순국한 350여명의 군사들은 ‘우리도 서양식 무기가 있었다면 그들보다 더 잘 싸웠을 것’이라며 분통해했다.

어렵사리 찾아간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선생의 무덤은 쓸쓸했다. 이건창 선생은 조선 9대 문장가 중 한 분이며, 탐관오리들을 징치했던 암행어사의 무덤치고는 소박하다 못해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이건창이 지은 오언장편(五言長篇)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남쪽 마을에서는 하얀 술 거르고, 북쪽 동네에서는 송아지 잡는데, 홀로 서쪽 이웃집에서는 구슬프게 밤새워 우네….’ 어느 빈농의 추석풍경을 노래한 시로 언제나 백성의 편이었던 선생의 성품을 그대로 담고 있다.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한문의 이치를 터득했을 만큼 신동이었던 선생은 14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1877년 흉년이 들어 백성은 굶주리고 있는데도 충청감사 조병식이 수탈을 일삼자 고종은 선생을 암행어사로 보낸다. 그러나 당시 권세를 누리던 민(閔)씨 일가와 내통한 조병식은 어사가 보낸 장계를 중간에서 빼앗아 오히려 포상하는 글로 바꾸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알아챈 선생이 서둘러 감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오히려 조병식을 시샘하는 부덕한 인물이라며 선생을 벽동으로 유배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런 나라에서 꿋꿋이 어사로 활동하며 많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선생은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고령에 신병이 겹쳐 적과 맞설 수 없음을 비관하여 자결하고 만다.

선생은 생전에 청국과 일본이 우리의 땅을 마구 매입하는 것을 알고 이를 막으려했다. 청국공사가 이를 따지자 선생은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해 버렸다. 청국공사는 정부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으나 결국 선생의 집념에 무릎을 꿇고 매수계획을 포기하였다.

이건창은 개성에서 태어났지만 생애 대부분을 강화에서 보냈다. 선생의 무덤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고혼을 위로하니 한줄기 바람이 묘소를 스치고 지난다. “관리가 잘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고통 받는다오. 관리로 있을 때 나라가 망했으니 나는 명백한 죄인이오. 무릇 관리가 치세를 잘못하면 살인보다 더한 중죄를 짓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오.”

영재선생 영가의 한탄이 바람을 타고 내 귀에 들렸다. 박문수와 쌍벽을 이루며 절개 곧은 암행어사였던 이건창 선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관리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관리의 본분과 바른 정치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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