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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혜정 칼럼] 미래 세대를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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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요즘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중학생 때부터 투표권을 주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입시교육의 장막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들은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시대에 ‘팩트 체크’는 물론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최신 정보를 찾아내고 연결하면서 성찰적 근대의 훌륭한 유권자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

2011년 5월20일자 첫 기명 칼럼을 꺼내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3개월이 되는 날, 세계 시민 집회를 열자는 쓰지 신이치 선생의 편지를 소개하며 시위를 부추기는 글이었습니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3·11 사태 이후 집중도 안 되고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한결 맑아진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엑스레이를 통과하였고, 많은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나의 일부, 그리고 지구의 일부가 죽었고, 그 주검은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2008년 월가 파동 이후, 2011년 후쿠시마 재난 이후,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18대 대통령 탄핵 이후 많은 것이 보다 분명해졌습니다. 인간을 신의 자리로 등극시킨 ‘근대’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지구적 재앙과 후대의 불행을 담보로 한 것임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 칼럼은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탈원전 100만인 집회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죽음의 땅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자. 그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가겠다는 다짐도 하자. 그래서 6·11 모임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야 할 것이다… 즐거운 시위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지구를 살리는 든든한 일꾼이 되어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상쾌해진 아침이다.”

7년 동안 줄기차게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온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이 지구를 살리는 든든한 일꾼으로 성장하는 생태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번 6·13 지방선거에 만 18세 투표권을 얻어내기 위해 삭발에 밤샘 농성까지 벌이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4월 국회에서 통과가 되어야 이번 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데 기성 정치계는 당장의 표 계산에 급급하고, ‘어른’ 시민들도 별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치매 노인도 투표하는데 18세나 된 디지털 시대의 청년시민들은 왜 투표할 수 없는지 물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19세’라는 숫자는 6·3·3 근대 학교 제도에 맞춘 숫자일 것입니다. 국가에서 만든 학교를 졸업한 후 평생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았던 ‘1차 근대’의 생애주기에 맞춘 이 숫자는 이제 별 의미 없는 숫자가 되고 있습니다.

성찰적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참정권에 대해 새로운 발상을 해야 합니다.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근시안적 정치에 가담하여 지구 생태계를 망가뜨린 기성세대는 일정한 자숙과 학습의 시간을 거친 후에 다시 투표권을 회복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대 간 자원 불균형과 인구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를 제대로 대변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시민들은 어느 때보다 고차원적인 정치사회활동을 벌일 수 있어야 하고 그를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기본소득과 수시로 정치공론화를 할 수 있는 장소들이 만들어져야겠지요.

나는 요즘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중학생 때부터 투표권을 주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입시교육의 장막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들은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시대에 ‘팩트 체크’는 물론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최신 정보를 찾아내고 연결하면서 성찰적 근대의 훌륭한 유권자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구의회를 참관하고 지역 방송국 활동과 예비투표를 하면서 훈련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사춘기는 1차 근대의 사회적 발명품입니다. 자신과 자신 세대의 삶을 책임지는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중2병’도 사라질 것이고 제도교육 현장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학급회장 선거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니 절망적이지요. 세상이 좋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어른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 같아 우울합니다.

“골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즐거운 이야기만 하자.” 최근에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 나도 전환의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머리 굴리기를 멈추기는 쉽지 않겠지만 요가를 하고 텃밭도 가꾸고 인연을 돌보면서 즐겁게 말하는 존재로 변신을 꾀해볼 생각입니다. 새벽에 글을 직조하는 시간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간 나눠주신 마음 덕분에 오랫동안 이 지면에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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