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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정담] 자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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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자충수는 바둑에서 나온 용어로 본인의 수를 줄이는 돌을 놓는 것을 말한다. 미련한 사람이나 둘 것 같지만 너무 약아서 자기 꾀에 넘어가는 자충수도 있다. 정치판이 특히 그렇다. 수가 많고 행동이 재바른 좌파들이 우파보다 자충수에 취약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파는 분열로 망하고 좌파는 자충수로 망한다'는 정치 격언도 있다. 여권이 연거푸 두 가지 자충수를 두는 바람에 호되게 당하고 있다. 먼저 '드루킹 사건'. 이 사건은 문재인정부 비판 댓글이 조작된 혐의가 있다며 더불어민주당이 네티즌들을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잡고 보니 범인이 민주당 당원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댓글 수사 자체는 처음부터 여권의 자충수가 될 개연성이 높았다. '키보드 워리어'들의 이념 성향은 좌우로 갈리지만 젊은 층 비중이 크고 열성적인 현 정권 지지층이 반대 진영을 압도한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댓글을 문제 삼기로 했을 때 어느 쪽이 불리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다만 여당 눈에는 문재인정부 찬양 댓글은 순백의 민의, 비판 댓글은 '매크로'로 돌린 사악한 조작글로만 보였던 게 문제다. 확증편향의 자충수라고 할까.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낙마 사건은 자충수가 중첩된 경우다. 가뜩이나 '참여연대 정부'라는 말이 나오는 판에 전문성도 없는 이 단체 출신을 임명한 것이 첫 번째 자충수. '정무위 저승사자'로 불릴 만큼 남에게 엄격했던 그가 스스로에게는 매우 관대했던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도덕점수 평균'을 계산하려 든 것이 두 번째 자충수. 이미 민심이 돌아선 상황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확인 사살'을 청한 것이 세 번째 자충수. 전체적으로는 오기(傲氣)의 자충수.

좌파들이 자충수를 잘 두는 데는 지향하는 기준이 높은 이유도 한몫하는 듯하다. 대체로 좌파는 우파에 비해 도덕적 명분론이 강하다. 비판이 매섭다. 남에게 들이미는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해 경계하면 천하무적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문제다. 현 정부 들어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 8명이 낙마할 때마다 과거 야당 때 말과 기준이 족쇄가 되곤 했다. 그래서 앞서 정치 격언은 이런 식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위선으로 망한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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