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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후줄근해서 핫한… '아버지 패션'이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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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옷장서 방금 꺼낸 듯한 헐렁한 무채색 양복·'추리닝' 패션

발렌시아가 등 브랜드에서 선보여… "아빠에 대한 존중, 패션으로 승화"

조선일보

패션계에서 소외됐던 ‘아버지’가 주목받고 있다. 2018 발렌시아가 봄여름 패션쇼에서 한 모델이 아버지의 품처럼 넓은 재킷을 캐주얼하게 소화했다. /발렌시아가


'패션'과 '아버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다. 몸에 꼭 맞게 재단된 정장을 '남성 패션'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아버지를 위한 패션'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오빠도 아빠도 아닌 '아버지 스타일'은 어쩐지 패션계가 영원히 다룰 수 없는 영역인 듯했다.

그런 '아버지 패션'이 요즘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 브랜드 발렌시아가가 2018 봄·여름 쇼에서 선보인 '평범한 아버지들' 퍼레이드 이후 패션계에선 '아버지 옷장을 뒤져라'는 주문이 유행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드코어(dadcore)다. 아버지(dad)와 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을 뜻하는 놈코어(normal+hardcore)의 신조어다.

발렌시아가 디자이너인 뎀나 바잘리아는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 놀러 온 젊은 아버지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의상을 만들었다. 이후 마틴 로즈, 펜디, 고샤 루브친스키 등의 디자이너들이 아버지 옷장에서 방금 꺼낸 듯한 재킷과 점퍼를 선보였다. 빛바래거나 우중충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길거리 좌판에서 막걸리를 나누는 아저씨 옷차림을 그대로 옮겨온 듯도 하다.

몇 년 전만 해도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손가락질받았던 등산복 패션도 최근 패션쇼 메인을 장식했다. 2030세대가 열광하는 디자이너 중 하나인 버질 아블로는 뉴욕에서 선보인 '오프화이트' 브랜드 쇼에서 등산복 바지와 바람막이에 넥타이를 맨 출근복을 선보이기도 했다. '추리닝'이라 해야 더 어울리는 '아버지 운동복'을 비롯해 모자와 가방까지 1970~80년대 아버지들이 썼을 법한 물건들이 골동품처럼 재해석돼 패션계를 누빈다. 브랜드마다 앞다퉈 내놓는 투박한 '아버지 운동화'도 내놓는 대로 매진이다. 그동안 '남자친구 패션' '할머니 패션' 등 특정 캐릭터를 딴 스타일이 인기를 끈 적은 있지만 요즘처럼 '아버지'만 붙이면 유행하는 일은 전례가 없다시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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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열린 2018헤라서울패션위크에 초대받은 배우 엄지원은 아버지 옷장에서 꺼내 입은 듯한 스타일 정장에 운동화를 신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오른쪽 사진). 영국 브랜드 비비안웨스트우드 앵글로매니아의 2018봄·여름 의상을 입은 모델. 펑퍼짐한 남성복 바지와 긴 재킷에서 영감을 얻었다(왼쪽 사진). /김보라 기자·비비안웨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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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에선 '아버지의 참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늘어진 옷깃처럼 가족을 위해 살다 지치고 찌든 아버지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패션계에서는 "남자는 돈을 써도 아버지는 돈을 쓰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남자속옷지수(Men's underwear index)'라는 경제용어는 불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자들이 새 팬티를 산다는 건 불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 용어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특히 아버지들이 새 속옷을 사면 불황의 끝이 확실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커플룩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버지는 화보에나 존재하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매스미디어는 잘 차려입고 아이들과 시간 보내는 친구 같은 아빠, 일명 프렌디(friend+daddy)만 보여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패션계는 주목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가장의 무게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아버지들에 대한 존중이 패션으로 승화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언뜻 보면 후줄근한 모습이지만 지금의 중장년들이 젊은 시절 힙스터 문화를 일궈낸 패션 선두 주자였다는 점이 젊은 세대를 매혹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정민 트렌드랩506 대표는 "펑크, 히피, 록음악 등 1960~80년대 하위 문화를 주류로 올린 이들이 바로 요즘 중장년들"이라며 "이른바 '아버지 패션'은 가장 패셔너블했던 그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경외감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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