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사투리가 진했던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자카르타에서 신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우리가 쩔쩔매는 모습이 애처로웠나 보다. “걱정하지 마라, 한국 대사관 가서 얘기하면 새 비자 금방 내줄끼다. 니들 돈없재?” 그는 택시를 잡은 뒤 불쑥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를 건네줬다. 당시 돈으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연락처 가르쳐 주시면 돈을 보내드리겠다”고 말하자 그는 “씰데없는 소리 한다”며 택시문을 닫았다.
그제서야 긴장이 탁 풀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호의가 너무 고마워서였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어른’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한 아파트에 ‘5평형 빈민아파트 신축건’이라는 제목의 안내문이 붙었다. 서울시가 짓는 청년임대주택을 이들은 ‘빈민아파트’라 불렀다. 들리는 얘기로 주민의 70%가량이 여기에 동의한단다. 강동구 천호역 인근에 들어서는 청년임대주택도 반대가 심하다. 주민들은 여러 이유를 댄다. 지반이 약하고, 교통혼잡이 우려되고, 원래 다른 용도로 쓸 땅이었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기다. 속내는 ‘집값’ 아닌가.
서울시내 17평짜리 방 두 개 빌라 전세가 2억원이 넘는다. 지방 아파트 한 채 가격이다. 금수저가 아니라면 청년이 이런 돈이 있을 리 없다. 이들이 빈민인가.
대구 경북대 인근에는 ‘경북대기숙사건립반대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경북대가 짓고 있는 재학생 기숙사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인근에 원룸 공실이 4000여실에 달하는데 민자기숙사가 건립되면 공실이 6000~7000개는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근주민의 생계를 무시하고 대형건설사 배만 불리는 기숙사’라는 게 이들의 반대 이유지만 역시 진짜 이유는 아니다. 서울의 한양대, 고려대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해 상반기 서울시내 대학가 원룸 평균 임대료는 보증금 1378만원에 월세 49만원에 달했다. 청년이 돈주머니인가.
강원 양구, 경기 연천 등 접경지역에서는 상인들이 군 위수지역 폐지를 결사반대하고 있다. 장병들이 외출·외박 때 위수지역을 벗어나게 되면 상권이 죽는단다. 병사들과 부모들은 “위수지역 내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불만이다. 택시비도, PC방 이용료도 서울보다 비싸다고 장병들은 주장한다. 나라 지키러 군에 간 청년장병들이 봉인가.
이 정도면 어른들의 ‘갑질’이라 부를 만하다. 내 재산권, 내 생존권을 위해 청년들의 등골을 빼먹겠다는 것 아닌가. 부끄럽고, 참담하다. 따지고 보면 내 아들이거나 한 다리 건너 내 조카일 텐데 말이다. 자기욕심만 채우는 어른들이 존경을 받을 리 없다. 기초연금 증액은 찬성하면서 청년수당 도입은 반대한다. 젊음이 죄인가.
하지만 반전이 있다. 20년쯤 뒤 노인이 된 지금의 기성세대는 결국 지금의 청년들에게 기대야 한다. 그때 가서 ‘우리 좀 부양하라’며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설사 지금의 청년세대들이 돕고 싶어도 돕지 못할 수도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지금 갈라 버린다면 말이다. 청년을 윽박지르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단언컨대 시간은 기성세대의 편이 아니다. 청년의 편이다.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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