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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이창수의 불편한 뉴스] '완전한 사형폐지국' 기로에 선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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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부, 개헌안서 ‘사형’ 삭제…“사형폐지 첫단추” 평가

세계일보

“(사형제 폐지와의 연관성도) 물론 생각했다.”

최근 청와대에서 대통령 개헌안을 공개하면서 사형제 폐지 논란이 다시금 불붙고 있다. 개헌안에서 현행 헌법에서 ‘사형’이란 단어가 유일하게 등장하는 조항인 110조 4항이 사라지면서다. 그간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를 합헌 결정하며 해당 조항의 존재를 언급한 바 있다. 청와대는 일단 “헌법재판소가 결정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법조계 등에선 “사형제 폐지를 위한 포석”이란 시각이 대체적이다.

실제 조국 민정수석은 “조문이 빠졌다는 것을 전제로 헌재가 새롭게 위헌심사를 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개헌이 이뤄지면 헌재가 사형제를 위헌으로 결정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음을 내비쳤다. 더구나 개헌안에 ‘생명권’이 명시된 점 등에 비춰 사형제 폐지를 수차례 강조한 문재인정부가 사실상 폐지 행보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사형제 존치를 원하는 국민여론이 워낙 압도적인 데다 정치권에서도 부정적인 기류가 감지되는 등 넘어야 할 난관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고령화·미집행·과학수사…동력 잃은 폐지론

이번 개헌안이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미집행 기간이 길어지고 사형폐지론이 잠잠해진 상황에서 법률적으로 완전한 사형폐지국이 되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어서다.

세계일보

24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1980년대 중반부터 활발하게 이뤄지던 국내 사형폐지 운동은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동력을 잃은 상태로 분석된다. 물론 종교계를 중심으로 사형제 폐지 주장이 간간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관련 단체들이 과거처럼 사회적인 주목도를 끌 정도의 역량이나 파급력은 없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사형폐지운동을 이끌었던 조성애(86) 수녀, 문장식(83) 목사, 삼중(76) 스님 등 ‘1세대 운동가’들과 국회에서 목소리를 내던 정대철(74) 전 의원, 유인태(70) 전 의원 모두 고령인 데다 정계에서 은퇴한 상태다. ‘사형수들의 변호인’으로 알려진 이상혁(83) 변호사가 주도한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도 현재 유명무실한 상태로 알려졌다.

더구나 국내 사형폐지운동을 주도하던 천주교인권위의 핵심 간부가 최근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로 성추행 사실이 알려진 뒤 징계를 당한 것도 악재로 평가된다. 사형폐지와 관련해 종교계와 시민단체, 정치권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던 해당 인사가 물러나면서 젊은 세대에서 사형폐지 운동을 주도할 인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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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이 중단돼 국제사회에서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된 점, 사형 선고의 기준이 보다 엄격해진 점 등도 사형제 폐지론을 약화시킨 이유로 분석된다. 사형 집행이 오랫동안 없고 앞으로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인 만큼 관련한 논의가 치열해지기 어렵단 것이다. 과학수사의 발전으로 오판의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재판부 역시 사형 선고에 극도로 신중을 기하는 점도 영향이 적지 않다는 평가다. 1990년대 연 평균 23.9건이었던 사형선고(1심 법원)는 2010년대 들어 1.6건으로 급격히 낮아졌다.

◆위헌제청 이영학이 할 수도…부정여론 들끓을듯

압도적으로 높은 사형제 존치여론도 정부가 풀어야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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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가 지난해 9월 여론조사업체에 의뢰해 전국의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온라인+모바일 조사, 신뢰수준 95%, 표집오차 ±3.1%)에 따르면 국민의 79.4%가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숫자의 응답자들이 ‘사형 집행도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고, 사형제 반대 의견은 20.6%에 그쳤다.

대다수 국민들이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국회에서 여러 차례 사형폐지 법안이 발의됐지만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런 국민 정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관련 법안은 그동안 자유한국당 등 보수당 법사위 간사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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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6월 지방선거 때 개헌안이 통과되더라도, 사형제 위헌제청 대상이 최근 1심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진 ‘어금니 아빠’ 이영학 재판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여론을 반전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앞선 헌법재판소의 두 차례 결정(1996년·7대2 합헌, 2010년 5대4 합헌)도 사형선고(혹은 항소심) 60일 이내였던 정석범과 오종근의 청구로 심리가 진행됐다. 이영학은 1심 재판에서 줄기차게 “심신미약”, “정신질환” 등을 주장한 만큼 개헌안이 통과된다면 곧바로 위헌법률심판을 청구할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이 경우 사형존치 여론이 더욱 거세질 공산이 크다. 지난 2010년 ‘보성어부’ 오종근의 위헌제청을 물밑에서 지원했던 사형폐지 활동가들은 당시 거센 역풍을 경험한 뒤 사형수 선정에 신중을 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후 1·2심 사형 선고 후 대법원 재판 중이던 ‘총기 난사’ 임모 병장에 관련 의사를 타진했으나 임씨 측이 막판 철회하면서 위헌심판이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동정 여론이 만만치 않았던 임씨가 국민 정서를 자극하지 않고 헌법소원을 제기할 사형수로 적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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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영학의 경우 수사기관을 통해 드러난 범행 경위나 살해 방식이 워낙 엽기적인 데다 반인륜적이어서 외려 역풍이 불 가능성이 다분하다. 물론 그간 헌재가 간통죄 폐지 등 국민여론과 반대되는 결정도 여러차례 내렸고, 새로 바뀌는 헌법 조문을 바탕으로 법리만 검토한다하더라도 압도적인 국민 여론을 아예 배제하는 식의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사형폐지, ‘유럽통합의 산물’이란 분석도

일각에서는 유럽연합(EU) 국가와의 형사공조협약으로 인해 사실상 집행이 불가능해진 점, 인권을 강조하는 최근의 국제 흐름 등을 이유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기도 한다. 어차피 집행이 불가능해졌다면 법률적으로 없애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거다. 전세계에서 57개국만이 법률로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점(사형폐지 141개국)이나 아랍권 국가나 북한 등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형제도를 악용하고 있단 점 등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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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사형폐지=선진국’, ‘사형존치=후진국’식의 주장은 곤란하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된다. 미국을 비롯해 가까운 일본, 중국,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여전히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 만큼 이분법적 인식은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G20(주요 20개국) 중에선 13개국이 법률로 사형제를 폐지했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7개국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사형폐지의 국제적 흐름이 냉전 종식 이후 유럽 통합의 산물이란 분석도 있어 외국과의 단순비교는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 후 공산권 국가들이 인권문제 해결을 가입조건으로 내건 유럽평의회(CoE)나 EU 등 자유진영으로 편입하기 위해 사형제를 폐지했다는 거다. 이미 사형폐지국이었던 프랑스와 독일, 영국을 축으로 한 유럽통합 과정에서 형사법 체계의 통합을 위해 사형제 폐지가 필수불가결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2004년 터키가 사형제를 폐지한 것도 EU에 가입하기 위한 포석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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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국내외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 때 정부 의지가 강하더라도 사형제 폐지까지의 진통은 적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앞서 사형을 폐지한 국가들 대부분이 존치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폐지를 결정했고, 현 정부가 사형제 폐지에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조만간 대한민국은 완전한 사형폐지국으로의 갈림길에 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분명한 것은 국민 여론과 배치되는 상황에서 사형제가 폐지된다면 이후에도 관련 논란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사형제 존폐와 관련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지금부터라도 시급한 이유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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