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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동남아시아 산골마을에 새겨진 한국전쟁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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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⑧ 반공전선의 심장 ‘파땅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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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땅전투에 타이 정부의 반공 용병으로 투입 되었던 국민당 잔당 제3군의 31지휘 본부는 이제 관광용 기념관으로 치장하고 있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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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잔당 제3군이 터 다졌던 곳
CIA, 60~70년대에 정보기지 차려
군부·의회도 모르게 비밀전쟁 수행
폭탄 400만 개 라오스에 퍼부어

“모든 지명은 암호명으로만 불렀다”
잔당과 포로는 전쟁도구였을 뿐
비밀전쟁 자취는 온데간데 없이
파땅의 역사도 암흑 속에 파묻혀


메콩강을 뒤로 넘기고 이제 국민당 잔당 제3군이 터를 다진 산골 마을 파땅으로 간다. 치앙콩에서 국도 1155를 타고 남쪽으로 한 45킬로미터를 가면 반빵핫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여기서 국도 4029로 갈아타고 동쪽으로 꺾어 점점 가팔라지는 10킬로미터 산길을 더 달린다. 그 끝이 라오스를 마주 보는 1653미터 파땅산이고, 그 중턱에 파땅 마을이 있다.

26년 전, 지도에도 없는 이 마을을 물어물어 찾았을 때는 온몸이 누런 흙먼지로 덮였던 기억뿐이다. 마을 앞 마지막 고개는 사륜구동 지프로도 겨우 오를 만큼 애를 먹였다. 14년 전 두 번째 왔을 때도 그랬다. 이번이 세 번째 길인데 그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마을 안팎으로 포장도로가 깔렸고, 들머리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호텔, 식당, 찻집이 들어차 관광지 냄새를 풍긴다. 한 10년 전부터 마을 언저리에 있는 쁘라뚜 사이암(타이의 관문)이란 석회암 벼랑이 새해맞이 명소로 입을 타더니 제법 관광객이 찾아드는 모양이다.

한국전쟁 때 인민해방군 포로 1000명 추려

근데 반듯해진 겉보기와 달리 마을을 들여다보니 맥빠진 기운이다. 가게들도 파리만 날리고, 대낮인데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요즘은 320가구에 2000명쯤 된다.” 촌장 타나팟 쭐랏짬롱꾼(40) 말이다. 14년 전 취재 때 주민 수가 3000이었으니 그사이 크게 줄었다. 같은 기간 1만4000 주민이 2만3000으로 늘어난 국민당 잔당 제5군 본부였던 도이매살롱 마을과 견줘볼 만하다. “그쪽이야 관광객도 많고 차밭이 엄청나지만, 여긴 채소니 자두 같은 과일이 다다.” 타나팟 말은 이 마을에 돈이 안 돈다는 뜻이다. 주민 수가 줄고 풀 죽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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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땅전투는 국민당 잔당이 타이 정부의 반공 용병으로 투입된 출발지였다. 친이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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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 마을 꼭대기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을 메콩강이 뿜어내는 짙은 안개가 뒤따른다. 라오스 국경을 굽어보는 큰 부처가 눈에 들 즈음 온 천지가 안개에 뒤덮인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오직 하나 볼 수 있는 내 손바닥을 반가워하며 시간을 죽인다. 이윽고 햇살이 비치면서 가려온 파땅 마을 역사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내민다.

이 국경 산골 마을 파땅은 한때 동남아시아 반공전선의 심장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50년 초 중국 인민해방군에 쫓겨 버마 국경을 넘은 장제스의 국민당 잔당을 반공 용병으로 부리며 1960~1970년대 이 파땅에 비밀 정보기지를 차렸다. 냉전이 극으로 치닫던 1960년대 중반 미국 정부는 라오스를 인도차이나의 반공 방파제로 삼겠다며 극비리에 시아이에이를 동원했다. 시아이에이는 빠텟라오(라오스공산당) 견제, 라오스 내 호치민루트 파괴, 중국의 북베트남 지원 차단을 목표로 삼은 군사작전을 위해 비밀 정보부대 둘을 꾸렸다. 하나는 마쥔궈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잔당 제1독립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군이 사용했던 부대 이름인 특수대대 111(Bataillon Sp?ciale 111)을 베껴 몸통을 숨긴 엘리트 정보부대였다. 특수대대 111은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 인민해방군 2만 1300여 명 가운데 본토 귀환을 마다하고 타이완을 택한 1만 4715명 속에서 1000여 명을 뽑아 창설했다. 그로부터 한국전쟁 잔재는 소리도 없이 3200킬로미터나 떨어진 인도차이나 현대사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시아이에이는 파땅에서 중국 본토까지 작전 반경에 둔 이 두 정보부대를 투입해 대 라오스 비밀전쟁(1964~1973년)을 지원했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주물렀던 안보 고문 헨리 키신저는 군부와 의회조차 모르게 그 비밀전쟁을 치렀다. 시아이에이 지원 아래 미국 공군은 200만톤 웃도는 각종 폭탄 700만개를 인구 400만 라오스 시민 머리 위에 퍼부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나고 43년이 지났지만 라오스 땅에는 비밀전쟁이 남긴 총폭량의 30% 웃도는 온갖 불발탄과 8천만개에 이르는 집속탄 알갱이가 나뒹굴며 아직도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 한국전쟁 때 미군이 사용한 총폭량이 49만5000톤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일본 본토 공격에 사용한 총폭량이 15만6000톤이었던 사실과 견줘보면 그 비밀전쟁 강도가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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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땅 마을 꼭대기에 앉아 라오스를 굽어보는 부처는 한 평생 반공 전선을 달린 국민당 잔당의 염원을 알고 있을까?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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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땅엔 이제 나 말고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제 파땅 마을에서 그 비밀전쟁 자취는 찾을 수 없다. 파땅 마을에 살아 있는 국민당 잔당 80여명 가운데도 그 특수대대111이나 제1독립부대를 아는 이가 없다. 그러니 2004년 취재 기록을 잠깐 살펴보자. “중국 포로 출신 특수대대111 요원은 모두 타이완으로 되돌아갔다. 파땅엔 이제 나 말고 아무도 없다. 나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 시절 우린 작전 지역도, 명칭도, 목적도 모른 채 전선을 갔으니.” 특수대대111 요원 가운데 파땅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윈난 출신 천싱지(당시 77살) 소령의 이 증언이 마지막이었다. “라오스 작전에서 모든 지명을 포인트1023 같은 좌표나 리마사이트(Lima Site) 같은 암호명으로 불러 적한테 잡힌 요원이 되돌아올 수 없도록 했다. 물론 요원 관련 자료도 없다.” 라오스 비밀전쟁 때 시아이에이 조직책이었던 빌 영이 내게 귀띔해 준 말이다. 국민당 잔당과 중국 포로들은 전쟁 도구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모두들 세상을 떠났고 파땅의 역사는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

한편 1965년부터 타이공산당이 무장투쟁을 벌이자 타이 정부는 1971년 국민당 잔당 400명을 파땅전투에 용병으로 투입했다. 국민당 잔당은 파땅산을 점령했지만 80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타이 정부가 국민당 잔당을 반공 용병으로 부려먹은 출발지가 바로 파땅이었다. 그로부터 국민당 잔당은 1982년까지 반공 용병으로 뛰면서 1천여 전사자를 냈다. 그 대가가 파땅 마을 정착 허가였다. 그렇게 국경 마을 파땅에는 역사에 묻히고 현실에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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