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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토끼, 스라소니, 흰수리…연쇄적 죽음의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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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애니멀피플] 황주선의 안녕 생태계

이베리아 반도의 굴토끼를 숙주로

스라소니, 흰수리 개체수 감소 불러

이들을 죽인 ‘보이지 않는 힘’은

생태계 그물망 영향 미친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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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입에 물고 있는 이베리안스라소니.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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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 수업에 별 흥미를 못 느낀 사람이라 하더라도, 먹이피라미드나 먹이사슬 같은 단어는 어렴풋이 생각날 것이다. 잘하면 풀이니 토끼니 여러 동식물이 어지럽게 실선으로 이어진 그림이 떠오를지 모른다.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생태계의 동식물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그 수를 조절하고 균형을 유지한다고 배웠다.

한데 자연에는 동식물의 수를 조절하는, 생물 시간 그림 속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또 다른 참가자가 있다. 바로 병원체들이다. 바이러스, 박테리아, 선충 같은 다양한 병원체들은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더 많이, 더 자주 성공적으로 증식하기 위해 숙주동물들 그리고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동물학자들은 1980년대 초반부터 야생동물들과 생태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서 병원체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왔다. 최근엔 신종 질병의 증가와 맞물려 이러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스라소니와 맹금류, 바이러스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상호작용을 볼 수 있다.

토끼에서 시작한 재앙

연구는 지중해 근처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이루어진 이베리아 반도가 무대다. 이베리아 반도는 세계에서도 생물다양성이 높은 ‘핫스팟’으로, 이베리안스라소니(Iberian Lynx)와 스페인흰죽지수리(Spanish Imperial Eagle)라는 다소 생소한 동물들이 유일하게 사는 곳이다.

이 두 종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둘 다 지중해 생태계의 정점 포식자이며,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 등재된 극심한 멸종위기종이고, 마지막으로 굴토끼를 주요 먹잇감으로 의존하는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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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출혈성 바이러스(RHDV)의 주요 숙주인 굴토끼. 데이비드 일리프/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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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토끼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집토끼들의 조상종인데, 마지막 빙하기 이후부터 프랑스 남부부터 이베리아반도 그리고 북아프리카지역에 토착종으로 서식해왔다고 한다. 이런 굴토끼들을 위협하는 질병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RHDV라고 불리는 ‘토끼 출혈성 바이러스(Rabbit Hemorrhagic Disease Virus)’이다. 이 신종 바이러스는 1984년 중국의 집토끼에서 처음 대규모로 발생하여 삽시간에 유럽, 아프리카, 북미까지 전 세계에 사는 집토끼와 굴토끼 모두에 퍼져나갔다. 이베리아 반도 또한 예외일 수 없었는데, 역병이 돈 후, 이 지역 굴토끼의 개체수는 30~50%가 감소했었다고 한다. 그 뒤 이 바이러스는 풍토병이 되어버렸고, 면역력을 획득한 굴토끼들은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개체수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2010년, 프랑스에서 RHDV의 변종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무려 2년 만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휩쓸었다. 이 사건은 이베리아 반도의 생태계에 경고등을 울렸다. 연구자들은 RHDV2의 출현으로 1990년대 이후 다시 한 번 굴토끼가 줄어들면서 이베리안 스라소니와 스페인 흰죽지수리의 감소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는 이 두 종의 보전과 복원을 위해 막대한 노력을 부어온 터였다. 절멸된 지역에 동물을 재도입하고, 인공 번식과 방사 작업을 통해 두 종의 개체수와 분포 지역이 천천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특히 스페인 흰죽지수리의 경우 연구 지역이었던 스페인 과디아나 계곡에서 번식하는 개체들은 이제 겨우 다섯 쌍이 유지되고 있는 터였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귀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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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흰죽지수리도 생태계 그물망을 타고 들어온 바이러스의 희생자였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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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구결과,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야생 굴토끼들은 2011년, 바이러스가 들어오고 거의 동시에 그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스라소니와 흰죽지수리들 또한 2013~2014년부터 그 개체수가 줄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바이러스 변종은 성체 토끼들보다 어린 토끼들에 더욱 치명적이어서 굴토끼의 개체수가 좀처럼 늘어나지 못했고, 먹이 부족은 곧장 두 포식종의 번식 저하로 이어졌다. 연구자들은 즉각적인 굴토끼 방사와 인공 먹이 급여대 설치 등의 응급처치를 통해 스라소니의 번식률을 겨우 올려놓고 있지만, 향후 이들이 어떻게 서로 지내나갈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스라소니와 흰죽지수리들의 개체수가 늘어날 때까지 바이러스는 얼마나 기다려줄까.

이처럼 바이러스는 생태계 구성원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직접 감염되는 동물뿐만이 아니라, 이와 연결된 다른 동물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막대한 힘이 있다. 물론 제아무리 무서운 질병이라도 그 기세가 영원할 순 없다. 숙주동물들의 면역력 획득 여부나, 생존율, 번식률 등에 따라 그 운명도 결정될 것이다.

“생태계 속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점점 더 많은 학자가 먹이사슬 그림 속에 병원체를 포함하기 시작하는 이유이다.

앙고라 농장에서 출현

한데 이쯤 되면 애초에 야생 굴토끼 개체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진다. 원래 자연에도 존재하던 바이러스라면 생태계의 일부이니 괜찮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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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DV바이러스는 야생 토끼에 존재했다가 토끼 농장에서 변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한 토끼 농장에 있는 토끼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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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변종인 RHDV2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는 아직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 기원이 되는 RHDV의 출현을 되짚어볼 순 있겠다. RHDV라는 바이러스 자체는 사실 이전부터 야생 토끼들에 잔잔하게 존재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높은 치사율(70~100%)의 RHDV는 1984년 중국의 앙고라토끼 농장에서 처음 출현하여 살아있는 토끼나 가공품 수출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유럽으로 건너온 이 바이러스는 1986년 이탈리아 집토끼에서 보고되었고 그 후 유럽 전역의 토끼 농장으로, 그리고 결국엔 야생 굴토끼들에게 퍼져나가 대규모 폐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RHDV로 인한 혼란을 자연적인 현상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먹이그물 속 토끼에 궁극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스라소니도 바이러스도 아닌, 또 다른 힘일 수 있겠다.

황주선 질병생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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