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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Why] 한국 여성은 폭로라도 하는데… 동남아 여성들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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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잠금해제]

예비 남편, 시아버지가… 미투 사각지대서 눈물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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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한창이지만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이나 취업, 학업 등을 위해 국내에 들어온 이주 여성들이다. 이들은 내국인에 비해 느슨한 법적 보호 탓에 성폭력을 당하고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 대부분이 한국말이 서툴고 법률 지식도 없는 데다 도움을 받을 만한 곳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가해자들은 이를 약점으로 악용해 상식 밖의 일들을 벌이고 있다.

#1. 2016년 12월 필리핀 국적의 A씨는 언니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아버지, 오빠와 함께 한국에 왔다. 언니는 한 달 전 한국 남자와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로 살고 있었다. 언니의 남편 전모씨는 자신을 형부라고 부르라며, 결혼식 전까지 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편하게 쉬다 가라고 했다. A씨는 형부 전씨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결혼식 나흘 전. 전씨는 자신의 아내와 그의 동료이던 또 다른 필리핀인 여성과 저녁을 먹은 뒤, 갑자기 결혼 전 하루쯤 편히 쉬는 게 어떻겠느냐며 아내와 동료에게 제주도에 있는 호텔에 투숙할 것을 권유했다. 전씨의 아내는 고맙다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 집으로 혼자 귀가한 그는 거실에서 자고 있던 A씨를 강간했다. A씨는 무섭고 당황스러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른 방에서 아버지가 자고 있었지만, 심장병을 앓는 아버지가 놀랄까 겁이 나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고 한다.

#2. 베트남 국적 B씨는 딸의 출산과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성폭행을 당했다. 그의 딸은 물론 친동생도 한국 남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한국이 고마운 나라였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의 요청으로 농사일을 도우러 갔다가, 사돈의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B씨가 강간을 당하는 동안 B씨의 사돈은 밖에서 망을 봤다.

체류 신분 탓에 신고 못하는 이주 여성

법무부에 따르면 이주 여성은 지난 2008년 49만8845명에서 지난해 98만9204명으로 10년간 두 배가량 늘었다. 이 중 절반이 20~30대다. 대부분 결혼이나 취업 등을 위해 한국을 찾은 이들이다. 내국인의 경우에도 수많은 성범죄에 노출돼 있지만, 피해를 주변에 알리는 등의 대응에선 큰 차이가 났다. 성폭력을 경험한 내국인 피해자 중 48%가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렸지만, 이주 여성 피해자 10명 중 9명은 피해 사실을 숨겼다.

이들은 왜 피해 사실을 알리는 데 소극적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느슨한 제도와 불안정한 체류 신분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강혜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성폭력 사실을 알렸다가 자신이 되레 한국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며 "체류 불안 없이 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제도의 맹점이 이들을 불법 체류나 실직의 위험으로 내몬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용허가제와 귀화제도의 적격심사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근로자가 사업장을 옮길 때 고용주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주가 성폭력을 저지른 경우 이 승인을 빌미로 협박하고 일터를 옮기지 못하게 하는 탓에 피해가 이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업장을 무단으로 이탈하면 체류 기간이 남아 있어도 불법 체류 신분이 되기 때문에 고용주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용허가제에는 성폭력 등 부당한 처우를 당할 경우 사업주의 동의 없이 사업장을 옮길 수 있게 하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증명이 쉽지 않아 유명무실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귀화 절차에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귀화에는 특별귀화, 일반귀화, 간이귀화가 있다. 결혼 이주 여성들은 간이귀화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국적법은 한국인과 결혼해 2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면 귀화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귀화 적격심사 과정에서 남편이 불리한 진술을 하면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 한국 생활 3년 차인 한 베트남 여성은 "남편이 아내가 한국 국적을 얻는 것을 꺼려 협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국적을 얻으면 도망가려는 것 아니냐며 서류를 제출하지 않거나, 차일피일 귀화 절차를 미루는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남편의 가족 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 이런 구조는 이주 여성들에게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귀화 전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혼인 파탄의 원인이 상대방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해야 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증명 역시 이주 여성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뒤늦게 대책 마련 나선 법무부

정부 역시 체류 자격 문제 등으로 이주 여성이 성범죄 피해를 신고하지 못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 21일 '이주여성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관련 근거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법무부는 앞으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주 여성을 만나는 공무원은 이주 여성의 신원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통보하지 않아도 되도록 법적 근거를 만들기로 했다. 이제까지는 경찰, 검찰, 국가인권위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공무원은 미등록 외국인을 출입국관리소에 통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주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공무원을 만나 추방될까 봐 피해를 신고하지 못했다. 법무부는 또 성폭력 범죄 등을 이유로 수사나 소송을 하고 있을 때는 피해 여성이 불법 체류자 신분이어도 구제 절차가 종료될 때까지 체류를 허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성폭력을 저지른 고용주는 외국인을 고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근거도 마련된다. 성폭력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고용주는 외국인 초청 비자를 발급하지 못하게 제한한다는 것이다. 현행법은 외국인 근로자에게 윤락 행위나 마약류 판매 및 공급 행위를 강요했을 때만 발급 제한이 되고 성폭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김아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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