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30 (토)

'김정남 암살' 북한인 용의자 없이 미궁에 빠진 재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의 암살 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경찰이 “암살을 주도한 북한인 4명이 없다고 해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동남아시아 피고인 2명에 대해 편견을 갖고 수사를 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고 AP가 22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현지 경찰 당국자 완 아지룰 체 완 아지즈는 이날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이번 사건에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피고인들이기 때문”이라며 “말레이시아 경찰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를 통해 북한인 4명에 대한 수배 명령을 내린 바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이 북한인 4명을 추적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수사가 이들의 증언 없이 불완전했다는 피고 측 변호인단의 주장을 부인한 것이다.

조선일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VX(맹독성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아 암살됐다. / 조선 DB


베트남 국적 출신 피고인 도안 티 흐엉(30)과 인도네시아 출신 피고인 시티 아이샤(25)는 지난해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VX(맹독성 신경작용제)’를 발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이 희생양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북한인 4명의 ‘몰래카메라 출연 제의’에 속아 범행에 가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고 측 변호인단은 완 아지룰을 반대신문하는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이 수사에 편견을 갖고 제대로 임하고 있지 않다”며 “김정남을 죽일 의도가 없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내용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흐엉이 김정남의 얼굴에 VX를 발랐을 당시 그의 행동이 ‘공격적’이었다는 완 아지룰의 증언도 지적했다. 인간행동 전문가도 아닌 완 아지룰의 단어 선택이 수사 과정에 편견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흐엉의 변호를 맡고 있는 나란 싱 변호사는 “진짜 범인들은 떠났고, 그들은 피고인들을 데리러 오거나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며 “지금 피고석에 있어야 할 사람은 북한인 4명”이라고 주장했다. 김정남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인 4명은 범행 직후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흐엉의 또 다른 변호사인 살림 바시르는 “공항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흐엉은 김정남에게 접근하기 전 자신의 머리를 만졌고 김정남에게 VX를 바르고 난 뒤에는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며 “이는 손에 독을 묻힌 걸 안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월스트리트저널(WSJ)는 2018년 3월 20일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베트남 국적 피고인 도안 티 흐엉 측 변호인이 법원에 제출한 비디오를 공개했다. / WSJ 홈페이지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변호인단의 주장처럼 흐엉과 시티에게 뚜렷한 범행동기가 없어 보이는 만큼 법원이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우선 외교 문제가 가장 크다. 무죄로 보이는 피고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그들의 국가인 인도네시아·베트남과 말레이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하지만 유죄를 선고하지 않는다면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모은 이번 암살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츄핑 말레이시아대 국제외교학 교수는 “피고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못하면 말레이시아의 평판은 추락할 것”이라며 “말레이시아는 한국에게도 만족스러운 결론이나 설명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김정남 암살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4명이 북한의 정보요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도 문제다. 이전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김정남 암살 사건을 계기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가 북한을 암살 배후로 지목하자 북한이 발끈한 것이다. 북한은 현재 모든 혐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용의자 4명을 구금하라는 인터폴의 통보를 비롯해 모든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는 암살 사건 직후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 결과는 믿을 수 없다. 한국과 결탁한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해 당국과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후 말레이시아는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을 파기하고 강철 대사를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당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북한과의 단교도 거론했다.

그러나 북한이 평양에 거주하는 말레이시아 외교관 등 9명을 인질로 삼으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이후 말레이시아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이정철(46) 등 북한인 2명을 석방해 김정남 암살 사건의 북한 국적 용의자 모두를 놓치게 됐다. 당초 김정남의 아들인 김한솔과 시신의 DNA를 대조하려던 것도 북한의 인도 요구에 무산됐다.

[박수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