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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악천후에 6명 중 4명 '0점'… 신궁 기보배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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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포커스] 대한민국 양궁 대표 선발전

숨막히는 정적, 화살 소리만… 최종 선발까지 1인당 4000발 쏴

리우 2관왕 구본찬도 탈락… 계파·특혜 無… "잔인할만큼 공정"

"그제는 비가 오고, 어젠 강풍이 불었는데… 오늘은 눈이 다 오네요."

21일 오전 경북 예천 진호국제양궁장. 눈이 가볍게 흩날리는 적막 속에 '댕~, 슉~, 딱~'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팽팽한 활 시위를 출발한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70m 떨어진 과녁에 꽂히는 찰나의 풍경. 24명의 궁사(남녀 각 12명)들은 6일째 접어든 국가대표 3차 선발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망원경으로 과녁을 주시하던 한 지도자에게 "온종일 가만히 활 쏘는 것만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으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지루하다고요? 지금 피가 마르는 심정입니다. 선수들, 코치들 얼굴 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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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궁사들의 활 시위는 멈추지 않는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 대표팀은 8개월(2017년 9월~2018년 4월)간 다섯 차례 테스트를 거쳐 선발된다. 선수와 지도자들은 이 기간을‘피 말리는 지옥’이라고 부른다. 지난 21일 국가대표 3차 선발전에서 과녁을 겨냥하고 있는 선수들.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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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양궁은 자타 공인 세계 최강이다. 지난 9차례 올림픽에서 총 39개(금23·은9·동7)의 메달을 거머쥐었다. 이런 성과를 내기 위해 치러지는 대표팀 선발전은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급이다. 이번 3차 선발전(총 6회전)만 봐도 그렇다. 2016 리우올림픽 2관왕 구본찬(25)은 3회전 이후 고배를 마셨다. 올림픽 메달 4개(금3·동1)로 여자 신궁(神弓) 계보를 잇는 기보배(30)마저도 22일 마지막 날 탈락했다. 이날 선발된 16명의 선수가 두 차례 평가전을 더 치러 최종 8명(이상 남녀 각각)만 오는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최종 대표 선수가 선발전·평가전을 통틀어 쏘는 화살만 약 4000발이다.

한국 양궁의 힘은 계파·특혜 없는 선발전에서 나온다. 현재 양궁 국제 경기 방식은 일대일 토너먼트제다. 하지만 승패만 가리는 토너먼트 특성상 개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같은 소속 팀 선수끼리 '짬짜미(승부담합)'가 가능하다는 단점도 있다. 협회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리그제(모든 선수와 경기를 치르는 방식)와 기록제(점수로만 순위를 정하는 방식)도 병행해 대표 선수를 뽑는다. 채점 방식도 '난수표'처럼 복잡하다. 선수 순위뿐만 아니라 기록에도 별도 배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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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발전에선 이따금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고개를 흔들거나 심호흡을 하는 선수도 있었다. 결정적 실수 한 번이 태극마크를 좌우할 수 있는 터라 베테랑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묻어났다. 김성훈 대표팀 총감독은 "총 8개월, 다섯 차례 테스트(선발전 3회·평가전 2회) 자체가 곧 강한 대표팀을 만들기 위한 훈련"이라고 말했다. 한 실업 팀 감독은 "양궁 선발전은 잔인할 만큼 공정하다. 선발전을 치를 때 우리끼리 '또 지옥이 시작됐다'고 우스갯소릴 한다"고 했다.

변화무쌍한 날씨도 선발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날씨를 이유로 선발전이 미뤄진 적은 없다고 한다. 지난 20일 리그제 경기에선 동시에 사대(射臺)에 섰던 여자 선수 6명 중 4명 화살이 흰 바탕(0점)을 맞을 정도로 바람이 거셌지만 경기가 강행됐다. 장영술 협회 전무는 "날씨에 따라 일정을 바꾸는 건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 다양한 환경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도 오히려 좋은 경험이고 선발전의 한 과정"이라고 했다.

양궁에도 한때 파벌이 존재했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가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국가대표 자격을 유지하는 '추천제'도 있었다. 하지만 양궁인 사이에서 '이대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퍼지며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공정한 선발전 시스템을 적용했다. 지금은 양궁 선발전 방식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다른 종목들도 적지 않다. 한 양궁인은 선발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기존에 잘했던 선수에겐 경각심, 새로 국가대표에 도전하는 선수에겐 희망을 주는 거죠."

[예천=이순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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