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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잘 찍은 마침표 하나, 열 문장 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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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적 해석위해 생략하던 마침표… 詩 개성 강조하는 도구로 다시 등장

"적절한 장소에 찍힌 마침표 하나가… 의미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 조재룡 고려대 교수는 최근 시 비평집 '의미의 자리'에 수록한 '구두점의 귀환'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조 교수는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부터 마침표 생략을 통해 문장의 해석 가능성을 늘리려는 시도가 생겨났고, 1980년대 이후 국내 시단에서도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면서 "최근엔 문장을 명료하게 하거나 화자의 행위 및 시어의 상태 등 개성을 강조하는 도구로 마침표가 다시 호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박상순 시인의 새 시집‘밤이, 밤이, 밤이’수록작. 문장마다 마침표를 꼼꼼히 찍었다. /이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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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언 시인이 낸 시집 '한 문장'에서도 이 현상은 유효하다. 긴 산문시를 주로 선보인 김 시인은 "과거엔 속도감과 중의적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 산문시에도 마침표를 안 찍는 경우가 잦았지만 호흡과 속도 조절 차원에서 마침표는 중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5일 '현대문학 핀 시리즈' 첫 시집으로 나온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역시 마찬가지다. 산문시뿐 아니라 짧은 문장에 행갈이가 잦은 시에도 꼬박꼬박 마침표를 썼다. 박 시인은 "모호성을 줄이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비주얼'은 때로 의미의 요소가 된다. 문정희 시인은 3년 전부터 마침표 찍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 시인은 "마침표가 많으면 시각적으로 지저분해 보여 편집자들이 일부러 삭제하기도 했다"면서도 "마침표는 문장 종결에만 쓰이는 게 아니라 '다음 문장부터 의미나 전개가 변전(變轉)된다'고 예고하는 기능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지난해 발표한 시 '곡시'를 출판사에 보내면서 "절대 마침표를 빼지 말라"고 당부한 이유다. 문 시인은 "외국어 번역자가 '시에 마침표가 없어 전달이 난감하다'고 문의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부언했다.

새로운 마침표도 등장했다. 김현 시인이 지난달 낸 '입술을 열면'은 대부분의 수록시 마지막 문장에 '☆' '⊙' 등의 특수 문자로 종지부를 찍고, 이를 각주 부호로 사용하는 실험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수록작 '장례식장에서'의 마지막 문장은 '곧 떠날 사람이었다'이고 조기(弔旗)를 연상케 하는 특수 문자 '●'이 마침표로 쓰인다. 다시 '●'는 시 아래 이어지는 '떠나야 할 사람은 왜 모두 백발입니까'란 글의 첫머리에 각주 부호로 쓰인다. 그러니 이 새로운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문장의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는 문(門)인 셈이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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