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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영화로운 세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의 독살 … 영국과 러시아는 왜 앙숙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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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가 있어. 자네가 반드시 찾아내야 하네.”


해고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뭘 어쩌라는 건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는 어안이 벙벙합니다.

때는 냉전이 한창이던 1974년. 영국 비밀정보부 MI6에서 일하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퇴직한 그는, 조직의 수뇌부에 침투한 두더지, 즉 이중첩자를 색출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죠. 스마일리는 고심 끝에 작전을 개시합니다.

차갑고 음산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스파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서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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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스마일리로 분한 게리 올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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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영국에서 러시아 스파이였던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독극물 공격을 당해 의식불명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국에서 일어난 테러에 영국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죠.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러시아 정부를 배후로 보고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했습니다. 제재도 강화했죠. 그러나 최근 대선에서 승리해 ‘21세기 차르’로 등극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터무니없다”며 영국 외교관 23명을 맞추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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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스파이였던 스크리팔이 독극물 공격을 당한 장소 근처에서 조사를 벌이고 있는 조사관. 특수복을 입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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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건, 러시아로 추정되는 세력이 영국에서 이런 일을 벌인 게 처음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1909년 세계 최초로 첩보기관을 설립하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국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요.

영국과 러시아 스파이들 간 ‘앙숙의 역사’는 어땠을까요.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다섯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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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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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오프닝 시퀀스.

음습한 기운이 스민 헝가리의 골목길에서 영국 요원이 총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MI6는 발칵 뒤집어지고, 소련 첩보기관 KGB(현 러시아 연방보안국 FSB와 해외정보국 SVR의 전신)가 심어놓은 이중첩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죠.

그런데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처럼 화려한 액션을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끊임없이 누군가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작전을 펼쳐야 하는 스파이들의 음울한 세계에 집중하죠. 그 분위기는 가히 압도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MI6 출신 작가 존 르 카레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원작 소설을 썼거든요.

소련이 주축인 공산주의 진영과 서구권이 팽팽히 맞서고 있던 냉전 시대, 첩보기관들은 사활을 걸고 적의 정보를 수집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KGB가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킴 필비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죠. MI6가 주로 상류층에서 요원을 뽑는다는 점을 역이용한 덕이었습니다. ‘끼리끼리’ 뭉치던 엘리트들은 서로 크게 의심하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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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첩자 킴 필비가 사망한 후 소련에서 발행한 그의 기념우표 [사진=위키피디아]


킴 필비에게는 MI6의 최상부까지 올라가라는 지령이 떨어집니다. 그는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 고위직에 올랐고 온갖 기밀 문서를 소련으로 빼돌립니다. 문제는, 공산주의에 경도된 초엘리트 출신의 이중첩자가 킴 필비뿐이 아니었단 사실입니다. 일명 ‘케임브리지 5인방’으로 불리는 이들은 엄청난 정보들을 빼돌렸죠.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국을 경악게 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탄생했습니다.

최고위층의 배신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권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대표적인 게 1950년의 ‘알바니아 공작 실패 사건’이었죠. 서방 연합군이 알바니아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무장세력을 잠입시켰는데, 글쎄 딱 걸리고 만 겁니다. 수많은 사람이 처형됐습니다. 킴 필비가 정보를 흘린 탓이었죠. MI6는 점차, 2차 세계대전의 전우였던 미 CIA의 신뢰조차 잃게 됐습니다.

이제 MI6는 KGB라면 이를 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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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런던에서 불가리아 반체제 인사가 '독 우산'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앙포토]


더욱 극악할 만한 일은 1978년 런던 한복판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인공은 불가리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작가 게오르기 마르코프. 그는 공개적으로 공산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당연히 소련에도 눈엣가시였죠.

어느 날 워털루 다리 근처에 서 있던 그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다리를 콕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돌아보니 한 사내가 황급히 자리를 뜨고 있었죠. 우산을 이용한 독침 공격이었습니다. 결국 마르코프는 사망했고, MI6는 순식간에 조롱거리가 됐습니다. 그 유명한 ‘독우산 살인 사건’입니다. 배후가 KGB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죠.

드디어 제임스 본드들이 나선 걸까요.

절치부심한 MI6는 숱한 시도 끝에 거물급 KGB 요원을 포섭하는 데 성공합니다. 바로 올레크 고디예프스키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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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크 고디예프스키 [사진=다큐멘터리 '여왕 폐하 첩보기관의 비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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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6에 기밀정보를 넘기던 그는 1983년, 일생일대의 기로에 섭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비난하는 등 양 진영의 마찰이 극에 달했을 때였죠.

소련은 핵 공격의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고디예프스키는 이런 사태가 ‘장난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죠. 그는 소련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MI6에 급히 알렸습니다. 그제야 서방 국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소련을 진정시킵니다. 후에 고디예프스키는 영국으로 망명했고요.

다큐멘터리 ‘여왕 폐하 첩보기관의 비밀’(2014, 넷플릭스)에선 노인이 된 그가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반인륜적인 공산정권과 싸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 협조하기로 한 이후 매일매일 생사의 고비에 서야 했어요.”


1989년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냉전의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럼 영국과 러시아 스파이들의 악연도 끝난 걸까요?

2006년 11월 런던.

러시아 스파이였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독극물 테러(정확히는 방사능 물질 폴로늄210)를 당해 목숨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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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역시 런던에서 러시아 스파이였던 리트비넨코가 방사능 물질을 이용한 테러로 숨졌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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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향한 MI6 요원이었기에 영국 첩보원들은 분개했습니다. “다른 나라 요원을 죽인 것은 스파이계의 불문율을 어긴 것”(‘여왕 폐하 첩보기관의 비밀’에서)이란 비난이었죠.

그리고 12년 후, 또 런던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사실 MI6 요원들은 자신들이 ‘원조’일뿐 아니라 ‘신사’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최고 수장은 언제나 이름 대신 ‘C’로 서명하며 녹색 잉크를 쓴다는 등 대대로 이어지는 전통도 중히 여기죠.

숱한 영화와 소설 덕분일까요. 대중 또한 막연히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며 국내에서도 크게 흥행한 영화 ‘킹스맨’ 시리즈가 아마 그런 ‘상상’을 잘 반영한 작품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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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스맨'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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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MI6라고 신사다운 행동만 했을 리가요.

존 르 카레의 또 다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속 한 장면.

영국 첩보원인 주인공 리머스에게 그의 상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우리의 방법, 그러니까 우리와 상대의 방법은 거의 같아졌네. 우리 정부의 정책이 자비롭다는 이유만으로 상대편보다 덜 무자비할 수는 없다는 뜻일세.”


그리고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상대측의 핵심 인사를 제거하라고 지시하죠.

스파이의 세계엔 선과 악이 따로 없고, 그쪽이나 이쪽이나 잔혹하긴 마찬가지란 얘깁니다.

리머스의 주무대인 ‘추운 나라’는 동독이지만 소련을 뜻하기도 하고, 나아가 냉전 시대 자체를 은유하기도 하죠.

추운 나라, 추운 시대.

어디에 속했든 스파이로 살았던 이들의 삶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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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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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배신했던 ‘두더지’ 킴 필비의 말로는 쓸쓸했습니다.

스파이짓이 발각된 그는 1965년 소련으로 달아나지만, KGB는 그를 외면하고 오히려 의심했거든요. 필비는 사실상 자택 연금됐고 외롭게 죽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장례를 성대히 치러주긴 했지만 소련에서의 그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하기엔 어렵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요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우정을 나눈 친구를 배신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누명을 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좇다 보면 보는 이마저 눅진하게 내려앉죠. 그리고 씁쓸한 결론을 마주하게 됩니다.

스파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이들은, 냉전 시대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희생양이었단 사실 말입니다.

하긴,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이런 스파이들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MI6 출신 작가 매튜 던은 아예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는 냉전 시대보다 지금 런던과 유럽에 있는 스파이가 더 많다고 확신합니다.”(‘여왕 폐하 첩보기관의 비밀’에서)

물론, 확실한 건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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