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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퇴근이 퇴근이 아냐"…정규 근무시간 줄었지만 집에서 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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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시행 '주 52시간' 예행연습 나선 기업

#삼성전자에 다니는 채모(41)씨는 지난주 금요일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에 퇴근했다. 전날인 목요일에 제출할 보고서가 있어서 화요일과 수요일에 오후 8시까지 야근을 해서다. 이틀을 각각 2시간씩 초과 근무를 하고 나니 ‘주 40시간’ 근무제에 맞추려면 금요일은 4시간만 근무를 해야 했다. 주당 근무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부서장이 눈치를 준다.

#이마트에서 일하는 김모(36)씨는 얼마 전 금연을 결심했다. 그간 아내의 잔소리에도 ‘동료와 함께 흡연하며 나누는 담소’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부의 근로시간 단축 방안에 발맞춰 회사가 ‘주 35시간’을 시행하면서 ‘흡연 담소’가 여의치 않아졌다. 회사가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대응으로 집중근무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11시 30분, 오후 2시~4시는 각자 자리를 비우지 않고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 이 시간에는 사내 흡연실도 폐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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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부터 도입되는 ‘최대 주 52시간 근무’(300인 이상 사업장)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이 대응책을 마련하고, 예행연습에 나섰다. 당장 고용을 늘이기보다 생산성 높이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33.1달러로, OECD 평균(47.1달러)에 크게 못 미친다. 미국(63.3달러)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 교수는 "부담되는 고용 확대보다 현재의 인원으로 시간당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무시간이 짧아진 만큼 업무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이 속속 나오고 있다. 잦은 야근 때문에 ‘구로(사무실 소재지)의 등대’라고 불렸던 넷마블은 이달부터 ‘선택적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를 ‘코어 근무시간’으로 정하고, 나머지 시간엔 알아서 출?퇴근을 조절한다. 엔씨소프트는 1월부터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삼성전자는 아예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운영하고 있다. 예컨대 시차가 13시간 나는 미국 업체와 협업하는 업무를 맡은 담당자는 새벽에 출근해서 낮에 퇴근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전에도 자유 출근을 권장했지만 눈치가 보여서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는데 이젠 당당하게 퇴근하겠다고 말한다”고 말했다.

네이버는 2015년부터 시행해 온 '책임근무제’를 강화할 계획이다. 아예 근무시간을 정하지 않고 업무 성과로만 평가하는 것이다. 이마트는 회의시간은 물론 횟수도 절반으로 줄였다. 이마트는 월요일마다 팀장급 이상 회의를 오전 내내 진행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회의 자체도 소모적이었지만 임원들의 회의 자료를 준비하는 시간도 줄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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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를 활용한 효율 증대도 눈에 띈다. 이마트는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근로 장소인 물류센터에로봇을 도입했다. 로봇이 제품을 분류하고, 주문 라벨이 붙은 바구니에 주문 상품을 골라서 담고 포장도 한다. 안철민 이마트 김포센터장은 “사람이 카트를 밀고 다니며 해야 할 힘든 일을 로봇이 하니 다른 물류센터보다 근무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사무직도 인공지능(AI)을 도입해 효율성을 높인다. 예컨대 인공지능 면접 프로그램은 1만명의 입사지원서를 8시간이면 검토할 수 있다. 인사담당자가 이 일을 하려면 하루 8시간씩 70일을 매달려야 한다. 현재 국내 30여 개 업체가 인공지능 면접 프로그램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근무 공간의 제약도 없앴다. SK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사옥에 공유 오피스 공간을 만들었다. SK그룹 계열사는 물론 협력업체 직원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무실까지 이동하며 버리는 시간을 아끼자는 취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같은 조직과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일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프로젝트 중심의 공간에서 협업과 공유를 활성화하는 환경으로 업무 공간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롯데물산은 사무실에 고정석을 없앴다. 부장부터 사원까지 앉고 싶은 곳에 앉아서 일한다. 좌석 간 파티션도 없다. 서규하 롯데물산 과장은 “팀별로, 직급별로 앉지 않고 자연스레 업무 연관성이 있는 사람끼리 모여 앉게 돼 별도로 회의를 하기 위해 이동할 필요도 없고 효율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기업마다 저마다 방식으로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퇴근이 진정한 의미의 퇴근이 아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퇴근 시간 이후에 집에서 노트북으로 끝내지 못한 서류 작업을 하거나 카톡으로 업무 지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직원은 “공식 퇴근시간에 전원을 차단해버려서 거의 강제적으로 퇴근을 하고는 있는데 해야 할 일은 있으니 집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없어진 야근 대신 조근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있다. IT업체인 L사는 공식 출근시간(오전 9시) 전에 일한 시간은 업무준비시간으로 간주한다. 예컨대 오전 7시에 출근해도 9시까지 2시간을 업무준비시간으로 보고 실제 근무시간에 포함하지 않는다.

업종?업무별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반도체 등 개발 업무가 중요한 업종에선 주 52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협회 상무는 “개발직은 새 상품이나 새 기술 개발이 임박할수록 집중적인 연구시간이 필요해 야근이나 철야가 필수요건으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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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을 30분 늦춘 현대카드 직원이 아이를 직접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있다. [사진 현대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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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근이 많은 영업직도 변수가 많아 업무량에 따른 업무시간 예측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근로시간 기준을 주 단위가 아닌 월이나 연 단위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예컨대 스마트폰 개발팀은 야근을 하면서 신제품 출시를 하고 나면 한 달 정도 휴가를 써서 연간 법정 근로 시간을 맞추는 식이다.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근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마련한 간담회와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하는 행사에서 이 같은 내용을 건의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자영업) 간 양극화 심화 우려도 있다. 국내 전체 일자리의 90%를 점유한 중소기업은 현재도 낮은 처우로 인력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초과 근무로 인상 수당이 사라지면 사실상 실제 소득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300인 미만 사업장은 2020년 1월부터 순차적으로 ‘주 52시간’이 적용된다.

김민석 중소기업중앙회 과장은 “초과 근무가 없어지면 이전에 12시간 일하고 실제 소득이 400만원(초과수당 포함)이었던 소득이 8시간에 250만원이 되는 것”이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더 벌어져 중소기업은 사람 구하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수련·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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