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쿠바 모두 겪어본 현지 지식인 격정적 심경 토로
쿠바 경제개혁으로 인민 경제 안정되자 외국 관광객 밀물
소규모 자영업 허용하고 인터넷, 통신,여행 자유화가 열쇠
한국인도 2017년 1만 명 이상 쿠바 찾아 독특한 세계 여행
쿠바 아바나 시내에서 볼 수 있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공연. 라틴 음악과 춤의 향연이다. 1959년 혁명 이전에 활발히 공연되다가 거의 사라진 것을 독일 영화감독 빔 밴더스가 1999년 같은 이름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내놓고 이를 재발굴하면서 전 세계에 붐을 일으켰다.신나는 라틴 문화가 공산체제 속에 녹아 있는 곳이 쿠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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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아바나 혁명광장의 내무부 청사 벽에 강철 케이블로 만든 체 게바라의 모습과 그가 했다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가 새겨져 있다. 라틴 문화와 공산혁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곳이 쿠바다. |
쿠바 아바나 혁명 광장의 정보통신부 벽에 새겨진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혁명 동지 카밀라 시엔푸에고스의 모습. 혁명 첫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진 인물인데, 많은 사람이 카스트로로 착각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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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찾았던 혁명 광장은 호세 마르티 기념탑과 함께 쿠바 정부 청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내무부 건물 벽에는 쿠바혁명 지도자였던 체 게바라(1928~67)의 얼굴 형상이 강철 파이프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가 했다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도 새겨져 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정보통신부 건물 벽에는 쿠바 혁명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59)의 얼굴 형상이 보였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했다는 ‘잘했어, 피델(Vas bien, Fidel)’이라는 글도 새겨져 있다. 이곳은 쿠바의 혁명 성지이자 중심부다. 1998년 쿠바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2015년 이곳을 찾은 교황 프란시스코도 이곳에서 야외 행사를 열었다.
쿠바 혁명을 이끈 뒤 종신 지도자를 지냈던 피델 카스트로(1926~2016)의 2016년 4월 모습. 병환으로 쿠바 공산당대회에 참석하지 못하자 대표단을 모아놓고 관저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생전에 대중 연설을 즐겼는데 짧으면 2시간, 길면 4시간을 넘었다고 한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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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가 이런 날, 이곳에서 연설을 할 때 늘 하던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미국은 우리를 몇십 년(해마다 바뀜) 동안 경제적으로 봉쇄했다. 그래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100년도 버틸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쿠바 아바나를 지키던 모로 성에 소풍 나온 젊은이들. 도시락을 나눠먹고 있는데 한결 같이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정보통신혁명은 쿠바에도 예외가 아니다. |
쿠바 아바나 항구의 창고 모습. 오랫동안 방치됐는데 외국 투자를 얻으면 수리할 것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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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트리니다드의 수제 인형들. 쿠바 정부는 2011년 소규모 자영업을 허용하면서 공예품을 포함했다. 이를 계기로 외국 관광객에게 팔기 위한 목각과 수예 제품, 인형 등이 활발하게 개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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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2011년 택시, 민박집, 렌터카, 스파, 식당, 이발소, 미용실, 청소업, 수리업, 건설노동 등 180여 업종의 소규모 개인사업을 허용했다. 건설노동자들에게 가장 많은 일거리는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진 민영 식당의 리모델링 작업이었다. 이전에는 국가가 모든 건물을 보유하고 수리와 리모델링도 해줬다. 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뒤에는 국가가 이런 일을 더는 해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개인의 돈을 받고 이 작업을 맡았다. 이들이 수리한 낡은 건물은 민영 식당과 민박집으로 영업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일하던 건설노동자들은 2~3년 전부터 건설조합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민간기업은 허용되지 않으니 조합식 기업을 만든 것이다. 농민들이 이전부터 농업조합을 만든 것을 본뜬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 기업만 있던 쿠바에 건설조합, 농업조합, 미용조합 등 조합식 기업이 등장했다. 조합식 기업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다. 이런 조합식 기업은 정부나 공기업이 제대로 고용하지 못한 실업자를 많이 흡수했다.
민영화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분야가 민영 식당과 민박집이다.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이들 업종을 민영화했지만, 현지인 이용도 늘고 있다.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돈 있는 사람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 가이드는 부자는 아니더라도 수입이 늘고 있다. 밀수를 비롯한 불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쿠바의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국영관광사의 요트와 파워보트가 떠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바다 주행과 스노클링 체험, 작은 섬에서의 식사와 음악 공연 등으로 외화를 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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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 상점은 부정부패가 심하다. 국영 상점의 물건은 모두 나라 것으로 나라에서 정해준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 직원들은 모두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기업 직원이다. 국가에서 주는 월급이 미화로 20달러, 많아야 25달러 정도이니 생활비가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쿠바에는 물건이 부족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점원들이 구매자와 협상해서 정해진 가격보다 비싼 값을 주는 사람에게 판다. 예로 아디다스 신발 가격이 80달러인데 100달러를 주겠다는 사람에게 파는 식이다. 이런 거래를 한번 할 때마다 20달러가 남는데 이를 모아 직원들까지 나눠 갖는다.
쿠바 호텔 로비에 걸려있는 피델 카스트로(오른쪽)과 체 게바라(왼쪽)의 사진. 이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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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공무원을 보내 감사를 벌이고 부정을 적발한다. 하지만 감사 나온 공무원도 국가에서 매달 20~25달러의 월급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부정 감사는 업무라기보다 핵심 부수입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걸렸다 하면 국영상점 직원들은 감사 나온 공무원에게 20~40달러 정도의 뇌물을 준다. 거의 협정 가격이다. 한 건 적발에 한두 달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뇌물로 챙길 수 있으니 이를 제대로 적발해 상부에 보고하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 속에 잡음 없이 유지된다. 국영기업 직원이 민영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면 대개 이런 돈을 쓰는 경우일 것이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에 가로막혀 ‘좋은 게 좋은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주민들은 ‘소시올리시모(sociolisimo: 파트너주의)’나 ‘아미구이스모(amiguismo:친구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이런 상황을 돌려 말한다고 한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는 사람을 누구도 욕할 수 없는 상황이다.
1959년 쿠바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직후의 피델 카스트로 모습. 세월도 많이 흘렀고 피델은 2016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권력을 물려받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4월 중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 쿠바 공산당 제1서기 자리만 유지할 예정이다. 쿠바의 공산체제는 개혁을 통해 수리하면서 유효기간을 늘리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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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시내에 있는 민영 식당의 모습, 모터사이클이 벽에 걸려 있다. 서구 주요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카페나 식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직원들이 팁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
창업을 결심했을 때 가진 돈이 2000~3000달러밖에 안 돼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사는 가족, 친지와 외국인 친구로부터 투자도 받고 빌리기도 해 8만~10만 달러의 자금을 확보했다. 쿠바에서 창업하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에 가족, 친지나 친구가 있는 사람이다. 해외 거주 쿠바인은 쿠바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이르며 이 중 180만 명이 미국에 거주한다. 일부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미국에 거주한다. 유럽에는 쿠바 식당이나 시가 바가 인기다.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은 대부분 1959년 쿠바가 공산화된 뒤 망명한 사람들이다.
미국은 1966년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인 1966년 ‘쿠바조정법(Cuban Adjustment Act)’을 만들어 쿠바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 쿠바인은 누구든 1년 이상만 거주하면 영주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쿠바와 협상한 끝에 ‘젖은 발, 마른 발 정책(wet feet, dry feet policy)을 도입했다. 쿠바와 미국 사이 바다에서 잡힌 쿠바인(젖은 발)은 정치적 탄압이 예상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쿠바로 돌려보내고, 일단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쿠바인(마른 발)에겐 계속 입국 비자를 주고 1년 이상 거주하면 영주권도 부여하는 제도다.
쿠바는 2012년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하면서 이렇게 망명한 사람도 ‘배신자’에서 ‘경제적 난민’으로 용어와 개념을 바꿨다. 미국 거주 쿠바인이 쿠바의 가족, 친지에게 직간접적으로 보내는 송금이 쿠바 경제를 지탱하는 데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쿠바 아바나 시내 혁명광장에 자리 잡은 독립혁명 영웅 호세 마르티의 동상과 추모탑.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했지만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 동상은 허용해 쿠바 전역에서 볼 수 있다. |
쿠바는 공산혁명 이후 모든 것이 국영이 됐다. 카스트로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도 공산 정부가 쿠바 내 미국 민간 기업의 자산을 무상 몰수하고 국영화하면서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일부 소규모 자영업에 국한됐지만 이렇게 다시 민영화가 이뤄지면서 사실상 미국의 자본으로 창업이 열풍을 이루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쿠바혁명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를 배출한 아바나 대학 법과대학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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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한 호텔 벽에 걸린 체 게바라의 사진 '어느 혁명가의 초상'(오른쪽)과 게릴라 시절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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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는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에 올랐던 라울 카스트로가 이런 개혁을 주도했다. 하지만 막후에서 정책을 좌우했던 피델 카스트로의 허가를 받지 않고 라울이 2011년 이런 조처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쿠바인들은 믿고 있다. 피델은 자신이 구축했던 고전적인 공산 체제가 이렇게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세상을 떠났다.
쿠바 아바나 서부에 있는 헤밍웨이의 자택.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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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아바나 서부의 헤밍웨이 저택은 그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수리돼 손님을 맞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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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아바나 시내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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