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김정은 들으시오' 작심하고 밝히는 쿠바혁명 속사정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남북한, 쿠바 모두 겪어본 현지 지식인 격정적 심경 토로

쿠바 경제개혁으로 인민 경제 안정되자 외국 관광객 밀물

소규모 자영업 허용하고 인터넷, 통신,여행 자유화가 열쇠

한국인도 2017년 1만 명 이상 쿠바 찾아 독특한 세계 여행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시내에서 볼 수 있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공연. 라틴 음악과 춤의 향연이다. 1959년 혁명 이전에 활발히 공연되다가 거의 사라진 것을 독일 영화감독 빔 밴더스가 1999년 같은 이름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내놓고 이를 재발굴하면서 전 세계에 붐을 일으켰다.신나는 라틴 문화가 공산체제 속에 녹아 있는 곳이 쿠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혁명광장의 내무부 청사 벽에 강철 케이블로 만든 체 게바라의 모습과 그가 했다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가 새겨져 있다. 라틴 문화와 공산혁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곳이 쿠바다.


쿠바 지식인 현지 사정 소상하게 밝혀

지난 2월 쿠바를 여행하면서 쿠바 안팎의 사정을 잘 아는 중장년의 현지 지식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쿠바는 물론 중남미와 미국, 남북한의 사정에 모두 정통했다. 남북한 모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일해본 경험이 있다. 한때 쿠바 공직에도 있었고 공산당 조직 활동도 했으나 지금은 소규모 자영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여러 차례 별도로 대화를 나눈 결과를 바탕으로 그가 작심하고 고백하는 현재 쿠바 상황을 구술 형식으로 정리한다. 그는 쿠바 사회주의 체제를 개혁하려는 노력, 그 결과 현재 에 이르게 된 과정 등을 소상하게 밝혔다. 놀라운 내용과 함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쿠바인의 자존심도 엿보인다. 이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향후 추진할 개혁개방 방향 설정과 ‘인민경제 향상’ 노력에도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미대화나 남북경협 등을 진행하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쿠바는 북한과 더불어 오랫동안 완고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앙집중식 경제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쿠바는 내년 1월 1일로 혁명 60주년을 맞는다. 이 쿠바인을 아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 쾌활함과 냉점함을 동시에 지녔고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쿠바에 계속 살고 있으며 남북한 모두와 일하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혁명 광장의 정보통신부 벽에 새겨진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혁명 동지 카밀라 시엔푸에고스의 모습. 혁명 첫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진 인물인데, 많은 사람이 카스트로로 착각한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카스트로, 혁명광장 100만 앞에서 4시간 연설
피델 카스트로(1926~2016)는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를 유지하던 2008년 2월까지 수도인 아바나 시내 혁명 광장에서 수시로 연설을 했다. 이곳은 아바나는 물론 쿠바의 중심지다. 쿠바 독립 혁명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1853~1895)를 기리기 위해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 당시 건설을 시작해 피델 카스트로가 권력을 장악한 1959년 완공됐다.

지난 2월 찾았던 혁명 광장은 호세 마르티 기념탑과 함께 쿠바 정부 청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내무부 건물 벽에는 쿠바혁명 지도자였던 체 게바라(1928~67)의 얼굴 형상이 강철 파이프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가 했다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도 새겨져 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정보통신부 건물 벽에는 쿠바 혁명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59)의 얼굴 형상이 보였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했다는 ‘잘했어, 피델(Vas bien, Fidel)’이라는 글도 새겨져 있다. 이곳은 쿠바의 혁명 성지이자 중심부다. 1998년 쿠바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2015년 이곳을 찾은 교황 프란시스코도 이곳에서 야외 행사를 열었다.

중앙일보

쿠바 혁명을 이끈 뒤 종신 지도자를 지냈던 피델 카스트로(1926~2016)의 2016년 4월 모습. 병환으로 쿠바 공산당대회에 참석하지 못하자 대표단을 모아놓고 관저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생전에 대중 연설을 즐겼는데 짧으면 2시간, 길면 4시간을 넘었다고 한다. [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 봉쇄 100년도 버틸 수 있다" 기염
피델 카스트로는 매년 7월 26일이나 5월 1일에 이곳에 100만 명이 넘는 쿠바 주민을 모아놓고 몇 시간이고 연설했다. 짧으면 2시간 길면 4시간이었다. 7월 26일은 1953년 피델 카스트로가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실패한 날로 쿠바 무장 게릴라 운동의 기원이 된 날이다. 이후 카스트로는 자신의 게릴라 집단을 ‘7월 26일단’으로 불렀다. 그 깃발은 쿠바에서 국기나 다름없이 이용된다. 독립을 이룬 1902년 미국의 영향을 받아 줄과 별로 이뤄진 형태로 만든 쿠바 국기는 1959년 카스트로의 혁명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대신 7월 26일단의 깃발이 나란히 이용됐다.

카스트로가 이런 날, 이곳에서 연설을 할 때 늘 하던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미국은 우리를 몇십 년(해마다 바뀜) 동안 경제적으로 봉쇄했다. 그래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100년도 버틸 수 있다.”

중앙일보

식민지 시대 쿠바 아바나를 지키던 모로 성에 소풍 나온 젊은이들. 도시락을 나눠먹고 있는데 한결 같이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정보통신혁명은 쿠바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 말이 나오면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손뼉을 쳐야 했다.

청중 "너희나 버틸 수 있지 국민은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원조를 해주던 소련이 1991년 무너지고 쿠바가 이른바 ‘특별한 시기’를 겪으면서 연설을 듣는 청중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전시 중이던 동물이 사라져(그 이유는 너무도 뻔하다) 아바나 동물원이 일시 문을 닫고, 거리에서 고양이를 보기기 힘들어질(‘식탁으로 이사했다’는 농담이 오갔다) 정도로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카스트로가 이 부분을 연설하면 사람들은 “너희들이나 버틸 수 있지, 우리는 못 버틴다”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특권을 유지하며 잘 사는 공산당 지도부와 국민이 서로 갈라지기 시작한 시기다.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항구의 창고 모습. 오랫동안 방치됐는데 외국 투자를 얻으면 수리할 것이라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특권층 제외,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
쿠바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산주의 철학과 경제학을 의무적으로 배운다. 공산주의는 ‘모두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실상은 일반 국민은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하고, 당 간부는 특권을 유지하며 잘 사는 세상이었다. 당시 국민은 너무 살기 힘들었다.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자랑했지만, 이 역시 소련 원조가 사라지면서 질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살기가 힘들어지자 출산율도 떨어져 최근에는 1.7~1.6 정도까지 이르렀다.

중앙일보

쿠바 트리니다드의 수제 인형들. 쿠바 정부는 2011년 소규모 자영업을 허용하면서 공예품을 포함했다. 이를 계기로 외국 관광객에게 팔기 위한 목각과 수예 제품, 인형 등이 활발하게 개발됐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1년 소규모 자영업 허용하며 경제 활기
쿠바 경제는 흔들렸다. 식량도 자급하지 못했다. 소련이 보내주던 비료와 농약, 농기계와 부품, 그리고 농기계를 돌릴 연료가 사라지자 농업은 황폐해졌다. 쿠바 정부는 완강하게 고집하던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수리하기로 했다. 체제 개혁으로 국민 경제 위기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쿠바는 2011년 택시, 민박집, 렌터카, 스파, 식당, 이발소, 미용실, 청소업, 수리업, 건설노동 등 180여 업종의 소규모 개인사업을 허용했다. 건설노동자들에게 가장 많은 일거리는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진 민영 식당의 리모델링 작업이었다. 이전에는 국가가 모든 건물을 보유하고 수리와 리모델링도 해줬다. 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뒤에는 국가가 이런 일을 더는 해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개인의 돈을 받고 이 작업을 맡았다. 이들이 수리한 낡은 건물은 민영 식당과 민박집으로 영업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일하던 건설노동자들은 2~3년 전부터 건설조합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민간기업은 허용되지 않으니 조합식 기업을 만든 것이다. 농민들이 이전부터 농업조합을 만든 것을 본뜬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 기업만 있던 쿠바에 건설조합, 농업조합, 미용조합 등 조합식 기업이 등장했다. 조합식 기업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다. 이런 조합식 기업은 정부나 공기업이 제대로 고용하지 못한 실업자를 많이 흡수했다.

민영화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분야가 민영 식당과 민박집이다.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이들 업종을 민영화했지만, 현지인 이용도 늘고 있다.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돈 있는 사람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 가이드는 부자는 아니더라도 수입이 늘고 있다. 밀수를 비롯한 불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중앙일보

쿠바의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국영관광사의 요트와 파워보트가 떠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바다 주행과 스노클링 체험, 작은 섬에서의 식사와 음악 공연 등으로 외화를 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기업인 국영 상점에서 '물건 빼기' '뒷거래'
가장 큰 문제는 국영 상점이다. 국영 상점은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백화점이나 대형수퍼 형대로 운영하는 곳은 수입품이나 비싼 물건을 취급한다. 쿠바는 이중 화폐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쿠바에는 CUP(Cuban Peso)이라는 고유 화폐가 있지만 소련이 몰락하고 원조가 끊기면서 극심한 경제난을 겪자 정부는 1993년부터 미국 달러화 유통을 허용했다. 그러자 달러가 쿠바의 실질적인 화폐가 되자 2004년 CUC(Cuban Convertible Peso)을 도입했다. ‘외화와 바꾼 돈’으로 미국 달러화와 가치가 연동한다. 현지에선 1달러에 0.94정도로 교환되고 있었다.

국영 상점은 부정부패가 심하다. 국영 상점의 물건은 모두 나라 것으로 나라에서 정해준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 직원들은 모두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기업 직원이다. 국가에서 주는 월급이 미화로 20달러, 많아야 25달러 정도이니 생활비가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쿠바에는 물건이 부족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점원들이 구매자와 협상해서 정해진 가격보다 비싼 값을 주는 사람에게 판다. 예로 아디다스 신발 가격이 80달러인데 100달러를 주겠다는 사람에게 파는 식이다. 이런 거래를 한번 할 때마다 20달러가 남는데 이를 모아 직원들까지 나눠 갖는다.

중앙일보

쿠바 호텔 로비에 걸려있는 피델 카스트로(오른쪽)과 체 게바라(왼쪽)의 사진. 이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 나온 공무원, 두 달 월급 뇌물에 넘어가

이런 일은 국영 상점은 물론 호텔 등 다양한 국영기업에서 버젓이 이뤄진다. 나라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 수가 없으니 국정 가격과 시장 가격의 차이를 이용해 국영기업 직원들이 돈벌이를 하는 셈이다. 국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셈이다. 국영기업 사장은 이런 상황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원들이 사장에게도 적당히 돈을 상납하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공무원을 보내 감사를 벌이고 부정을 적발한다. 하지만 감사 나온 공무원도 국가에서 매달 20~25달러의 월급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부정 감사는 업무라기보다 핵심 부수입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걸렸다 하면 국영상점 직원들은 감사 나온 공무원에게 20~40달러 정도의 뇌물을 준다. 거의 협정 가격이다. 한 건 적발에 한두 달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뇌물로 챙길 수 있으니 이를 제대로 적발해 상부에 보고하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 속에 잡음 없이 유지된다. 국영기업 직원이 민영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면 대개 이런 돈을 쓰는 경우일 것이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에 가로막혀 ‘좋은 게 좋은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주민들은 ‘소시올리시모(sociolisimo: 파트너주의)’나 ‘아미구이스모(amiguismo:친구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이런 상황을 돌려 말한다고 한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는 사람을 누구도 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앙일보

1959년 쿠바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직후의 피델 카스트로 모습. 세월도 많이 흘렀고 피델은 2016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권력을 물려받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4월 중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 쿠바 공산당 제1서기 자리만 유지할 예정이다. 쿠바의 공산체제는 개혁을 통해 수리하면서 유효기간을 늘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쿠바 시내에 있는 민영 식당의 모습, 모터사이클이 벽에 걸려 있다. 서구 주요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카페나 식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직원들이 팁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영업 창업에 해외 거주 쿠바인이 물주
국영기업에 다니면서 자영업체에서 몰래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창업하는 사람들은 대개 직장을 그만둔다. 처와 아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민박집과 테이크아웃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직장이 있는 나도 틈나는 대로 가족을 돕는다.

창업을 결심했을 때 가진 돈이 2000~3000달러밖에 안 돼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사는 가족, 친지와 외국인 친구로부터 투자도 받고 빌리기도 해 8만~10만 달러의 자금을 확보했다. 쿠바에서 창업하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에 가족, 친지나 친구가 있는 사람이다. 해외 거주 쿠바인은 쿠바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이르며 이 중 180만 명이 미국에 거주한다. 일부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미국에 거주한다. 유럽에는 쿠바 식당이나 시가 바가 인기다.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은 대부분 1959년 쿠바가 공산화된 뒤 망명한 사람들이다.

미국은 1966년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인 1966년 ‘쿠바조정법(Cuban Adjustment Act)’을 만들어 쿠바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 쿠바인은 누구든 1년 이상만 거주하면 영주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쿠바와 협상한 끝에 ‘젖은 발, 마른 발 정책(wet feet, dry feet policy)을 도입했다. 쿠바와 미국 사이 바다에서 잡힌 쿠바인(젖은 발)은 정치적 탄압이 예상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쿠바로 돌려보내고, 일단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쿠바인(마른 발)에겐 계속 입국 비자를 주고 1년 이상 거주하면 영주권도 부여하는 제도다.

쿠바는 2012년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하면서 이렇게 망명한 사람도 ‘배신자’에서 ‘경제적 난민’으로 용어와 개념을 바꿨다. 미국 거주 쿠바인이 쿠바의 가족, 친지에게 직간접적으로 보내는 송금이 쿠바 경제를 지탱하는 데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시내 혁명광장에 자리 잡은 독립혁명 영웅 호세 마르티의 동상과 추모탑.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했지만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 동상은 허용해 쿠바 전역에서 볼 수 있다.


미국 망명 친척 있으면 부자 되는 아이러니
이에 따라 쿠바가 2011년 소규모 자영업을 허용하면서 미국 등에 초기 창업비용을 보내줄 가족, 친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게다가 상당수 쿠바 내 소규모 자영업체는 실제 주인이 해외 거주 쿠바인인 경우가 상당하다. 자영업 개설 허가를 받은 ‘서류상 주인’은 쿠바인이지만 돈을 투자한 실제 주인은 해외 거주 쿠바인인 경우가 많다. 거의 50% 이상으로 추정한다. 돈을 빌려 투자하는 방법도 있다.

쿠바는 공산혁명 이후 모든 것이 국영이 됐다. 카스트로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도 공산 정부가 쿠바 내 미국 민간 기업의 자산을 무상 몰수하고 국영화하면서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일부 소규모 자영업에 국한됐지만 이렇게 다시 민영화가 이뤄지면서 사실상 미국의 자본으로 창업이 열풍을 이루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중앙일보

쿠바혁명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를 배출한 아바나 대학 법과대학 건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고장 나면 고쳐야
피델 카스트로 정부가 이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사회주의 체제로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가 고용이다. 2008년 형인 피델 카스트로부터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를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는 나라 공무원과 국영 기업의 인력 활용 상황을 조사했다. 상황은 심각했다. 예로 10명이면 충분한 일터에 30명 이상이 근무하고 있었다. 무상교육으로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그냥 아무 직장에나 배치한 것이다. 그래야 수치상 실업률이 낮아지고 사회주의 국가의 이상인 완전 고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완전 고용이 아니라 과잉 고용이었다. 일자리는 월급만 받는 게 아니라 미래 발전도 보장해야 하는데, 이런 식의 과잉 고용은 자리 배치에 불과했다. 8시간의 근무시간 동안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퇴근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효율은 고사하고 직장에서 앉아있을 자리조차 없는 경우가 있었다.

중앙일보

쿠바 한 호텔 벽에 걸린 체 게바라의 사진 '어느 혁명가의 초상'(오른쪽)과 게릴라 시절 모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직·국영기업 근무 450만 중 150만 놀아
국가와 공기업이 고용한 인력 중 450만 명 중 100만 명 이상이 과잉 인력으로 나타났다. 당시 정부와 공기업 고용 인력 450만 명 중 거의 최소 100만, 최대 150만 명이 불필요한 인력으로 분석됐다. 쿠바 정부는 나라 경제의 회생을 위해 자영업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의 사례는 공무원과 공기업 고용 증가를 통해 실업률을 낮추려는 노력이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형식적으로는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에 올랐던 라울 카스트로가 이런 개혁을 주도했다. 하지만 막후에서 정책을 좌우했던 피델 카스트로의 허가를 받지 않고 라울이 2011년 이런 조처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쿠바인들은 믿고 있다. 피델은 자신이 구축했던 고전적인 공산 체제가 이렇게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세상을 떠났다.

북한, 쿠바에 경제개혁 벤치마킹 와야
소련식 중앙 계획경제를 고집해온 북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북한이 소련 원조로 잘나가던 시절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근무도 했다. 어떤 식의 개혁이 국민에게 그나마 숨통이라도 열어줄 수 있는지를 보려면 쿠바에 오기를 권한다. 또 하나. 쿠바는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을 통제하지 않는다. 외국과의 전화 통화도 막지 않는다. 외국의 뉴스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인터넷도 비용이 비싸서 그렇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쿠바 공산당이 체제 유지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자신감은 일정 부분 개혁이 성공하고 경제가 계속 잘 돌아가는 덕분에 가능하다. 쿠바의 눈으로 북한은 살펴보면 흥미로운 것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서부에 있는 헤밍웨이의 자택.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쿠바에 매료된 400만 외국 관광객
쿠바는 2016년 400만 명의 외국인이 찾았다. 수많은 사람이 쿠바를 사랑했던 두 사람의 외국인에 매료돼 그들의 흔적을 찾아 쿠바를 방문한다. 그중 한 명이 체 게바라다. ‘어느 혁명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그의 멋진 사진은 수많은 티셔츠와 기념품에 새겨져 혁명의 역사와 낭만을 되새김질하게 한다. 하지만 쿠바에서 혁명은 낭만도 이상도 아니라 현실의 생활을 좌우한다. 그런 쿠바에서 게바라는 5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역사 속의 인물일 뿐이다.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서부의 헤밍웨이 저택은 그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수리돼 손님을 맞았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쿠바에서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흔적 발견
쿠바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외국인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다.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의 작품의 상당수는 그가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머물렀던 쿠바 아바나 서부의 자택에서 탄생했다. 1952년작 ‘노인과 바다’는 쿠바가 배경이다. 쿠바를 찾은 외국인들은 그 유명한 럼주 베이스의 칵테일인 모히토를 비롯해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느꼈을 문학의 자양분을 만끽할 수 있다. 주로 노스탤지어(추억) 찾기 여행이다.

안전하고 저렴하며 매혹적인 쿠바 여행
나는 한국인들이 쿠바를 찾아 이 두 가지 외에도 다양한 것을 보고 즐겁게 지내다 돌아가기를 바란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라틴 음악과 춤, 고풍스러운 스페인 식민시대 건축이 여러분을 쿠바의 향기에 촉촉하게 젖게 할 것이다. 연중 따뜻한 기후, 에메랄드빛 바다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자연 자원이다. 소련이 무너져 비료와 농약을 공급받지 못하면서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1990년대부터 발전시켜온 쿠바의 유기농 도시 농업, 텃밭 농업도 매력적일 것이다.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시내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공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1만 명 이상의 한국인, 쿠바 찾아
중남미에서 가장 큰 섬이지만 외국인에겐 가장 물가가 저렴하고(쿠바 사람에게는 비싸게 느껴지기는 한다) 친절한 나라가 쿠바임을 강조하고 싶다. 밤길에 혼자 다녀도 안전한 나라이기도 하다. 강력 범죄나 총기 범죄가 쿠바처럼 드문 나라를 중남미는 물론 전 세계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사회주의 체계가 남아있는 쿠바를 살펴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생존을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쿠바에서 북한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쿠바인과 한국인은 이미 친구
정치적인 문제로 한국과 쿠바 사이에는 아직 국교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2016년 9000명 이상, 2017년에는 1만 명 이상이 한국인이 쿠바를 방문했다고 한다. 쿠바인은 한국인을 환영한다. 따뜻하게 친절하며 항상 쾌활한 쿠바 사람들은 여러분이 이 섬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일 것이다. K-팝과 한류 드라마를 좋아하는 쿠바인도 적지 않다. 쿠바인과 한국인은 이미 서로 친구다.

▶모바일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카카오 플러스친구] [모바일웹]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