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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대학 성폭력 4대 고리] 술게임하자며 추행…성폭력 문화에 찌든 대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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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세계] 매뉴얼 ‘17학번 김지은’로 본 실태

2017년 3월,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민지(가상). 민지는 술과 ‘술게임’이 포함된 아찔한 ‘신고식’을 치르며 대학 성폭력의 실상을 처음 경험해야 했다. 그건 끝이 아니라 기나긴 성폭력 위협 터널의 시작에 불과했다.

민지는 이후에도 선후배와 동료들이 함께 한 대학 문화, 이성 친구와의 연애 및 데이트, 사회 진출을 위한 취업 준비 과정 등 대학 생활 내내 다양한 방향에서 성폭력 위협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투 혁명’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가정을 벗어나 사회 첫발을 내딛는 대학 생활부터 강압적·차별적 성폭력의 씨앗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즉 대학 생활에서 싹튼 ‘강압적 성폭력 및 성문화’나 ‘성차별에 대한 피동적 인식’이 성폭력을 키우는 시발점이 되고 있다는 거다.

이에 따라 사단법인 ‘수원여성의전화’가 지난해 9월 펴낸 대학 내 성폭력 및 성희롱 대응 매뉴얼 ‘17학번 김지은’을 바탕으로 대학 생활 4대 성폭력 취약고리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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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 매뉴얼은 지난해 5월 수원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한 특강에 참석한 남녀 학생들은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던 고민들을 모아 완성됐다.

◆술 처음 접하는 신입생…성폭력 타깃 위험

지난해 신입생이던 민지는 아찔한 ‘신고식’을 치렀다. 술과 술게임을 처음 접한 민지에게 개강 총회는 곤혹이었다. 술게임에 걸린 사람에게는 게이샷, 레즈샷, 러브샷 등 ‘벌칙’이 주어졌고 민지도 곧 타깃이 됐다. 선배는 옆자리 동기와 러브샷을 강요했고 민지는 순간 당황했다. 그때 술게임을 그만하자고 요구한 여자 동기의 용기에 민지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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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는 이후 싸늘하게 변했고 일부는 그가 까다롭게 군다며 ‘프로불편러’라고 수근거렸다. 술에 취해 집에 가는 민지, 집을 향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부축했다. 러브샷을 강요했던 선배였다. 그는 “자취방에서 한 잔 더하자”고 추파를 던졌다. 당황한 순간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만하세요!” 아까 그녀를 도와줬던 여자 동기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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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17학번 김지은’은 대학 신입생이 성폭력 상황에 노출되는 첫 시기로 학기 초를 꼽는다. 개강 총회 등 각종 학과 행사는 술자리로 이어지고 술을 처음 접한 신입생들이 쉬운 ‘타깃’으로 여겨질 수 있어서다.

매뉴얼은 ‘술게임을 할 때 불필요한 신체접촉과 혐오적 발언을 하지 말 것’ ‘선후배 관계에서의 권력을 남용해 신입생에게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 것’ ‘학생회는 성평등 임원을 통해 과행사에서 성폭력 상황을 예방하고 대응할 것’ 등을 조언한다.

◆“민지가 꼼꼼하니까” 대학 내 만연한 성차별적 문화

민지는 얼마 후 꿈꾸던 대학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다. 즐거워야할 축제는 성 상품화의 장이었다. 주점에는 교복이나 메이드복장을 한 학생들이 서빙을 하고 메뉴판에는 ‘옆집 처자와 두루치기’ 등 선정적인 문구가 가득했다.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잘 내던 교수는 수업 중 ‘김치녀’ 등 여성 혐오적 표현을 거리낌 없이 쏟아냈다. 파워포인트 과제물 정리는 늘 여자에게 맡기려 했다. 여러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남학생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단톡방 사건이 터지면서 남자들을 대하는 것도 불편해졌다.

‘17학번 김지은’은 대학 내 만연한 성차별적 문화도 여성 대학생들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로 꼽는다. 그래서 ‘축제를 기획하는 학생회는 젠더감수성을 가지고 모두가 즐기는 축제를 준비할 것’ ‘일을 나누거나 수행할 때 성별보다 서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것’ ‘본인이 속한 단톡방 등에서 성차별적 문제를 인지할 경우 용기 있게 지적할 것’ 등을 주문했다.

◆“치마가 이게 뭐야” 상처만 남긴 첫사랑

민지의 첫 연애는 상처뿐인 사랑으로 남았다. 남자다운 모습이 멋있어 만나기 시작한 선배는 종종 강압적이었다. 가기 싫은 모임에 억지로 데려 가거나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요구하는 등 자신의 배려하지 않는 모습에 지쳐갔다. 옷차림을 간섭하거나 늦은 시간 외부 활동을 제한하는 등 심해지는 집착을 견디다 못해 이별을 선언했다.

선배는 이별 후에도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늦은 밤에도 전화를 하는 등 스토킹을 이어갔다. 다른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해 겨우 위기는 벗어났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변엔 온통 그가 만든 안 좋은 소문으로 가득했다.

매뉴얼은 이성 교제에서도 여성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성폭력이 많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옷차림 등 행동 통제가 대표적이다. 매뉴얼은 ‘행동통제 가해자에게 옷차림 통제의 위험성을 설명할 것’ ‘직접 개입이 어려운 이성간 폭력 행위를 목격하면 경찰 등에 신고할 것’ ‘주변에 스토킹 등 피해자가 있을 때 상황을 견디도록 함께 동행, 보호할 것’ ‘분위기에 이끌려 본인 의사에 확신 없는 성관계를 시작하지 말 것’ 등을 조언했다.

◆“학점·생활비가 원수” 학과 교수 횡포에 눈물 핑

2학기가 되자 민지는 근로장학생에 지원했다.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던 민지는 모 교수의 언어 폭력에 시달렸다. “남자 친구와 어디까지 갔어?” “볼이 참 귀엽다” 등 성희롱 발언에 시달렸다. 물건 나르는 일 등을 도와준다며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일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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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가 문제를 제기하자 느닷없이 그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학과 조교에게 이유를 묻자 해당 교수를 찾아가보라는 말뿐이었다. 학기 말에 받은 해당 교수의 과목 성적표도 최악이었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교수실을 홀로 찾아가야 했다.

매뉴얼은 대학에서 이뤄질 수 있는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문제를 인지할 경우 가급적 그 자리에서 즉시 문제제기 및 사과 요청을 할 것’ ‘대화 참여자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녹음을 해도 불법이 아니며 법적 효력이 있으니 성폭력 피해 때는 녹음을 할 것’ 등을 주문했다.

하정호 기자 southcros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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