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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만화 ‘너는 검정’ 낸 김성희 작가 “기억하는 사람이, 사회를 바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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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백혈병·용산참사에 이어, 1980년대 태백 탄광촌 이야기

‘5공이 그립다’는 말 듣고 구상 시작…풍경화 같은 그림도 감동

경향신문

“저는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느껴요. 궁금해서 자꾸 보다 보면 특별해지죠. 그러면 작업하고 싶어져요. 주위에선 ‘너는 이야기를 대충 주워서 만화를 그린다’고 농담도 하세요.” 만화가 김성희(43)는 특별한 사건보다 보통의 삶에 집중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단지 평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먼지 없는 방>은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은 황민웅씨의 부인 정애정씨의 이야기다. <내가 살던 용산>,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용산참사를 겪은 이들의 삶을 그렸다. <몹쓸년>은 서른살 미혼 여성이, <똑같이 다르다>는 특수학교에서 계약직 보조교사로 일하는 이가 주인공이다.

지난달 출간한 <너는 검정>은 1980년대 태백 광산촌에 살던 소년 ‘창수’의 목소리를 담았다. 산업 일꾼으로 각광받았지만,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죽음을 염두에 둬야 했던 광부들의 삶을 덤덤하게 녹여냈다.

사북항쟁 이후 ‘빨갱이’라는 낙인까지 견뎌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작가는 왜 관심을 갖게 됐을까. 김성희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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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오후 네 시의 생활력>을 작업 하면서 알게 된 분이 있어요. 지금은 이주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한 활동가 일을 하지만, 본인도 예전에 공장에서 일할 땐 그들을 많이 괴롭혔다고 말했던 분이었죠. 태백 탄광촌에서 태어나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야 했던 그분의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참 흥미로웠어요.”

마침 당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막 당선됐을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가는 ‘정말 그 시절이 아름다웠을까’ 고민했다. 그는 아름다운 시절의 허상을 드러내기에, 산업화의 전진기지였던 ‘탄광촌’만큼 적절한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작가적 호기심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결합해 <너는 검정>이 태어났다.

그는 취재를 위해 탄광촌을 세 번 찾았다고 했다. ‘창수’의 모델이 된 활동가와 함께 찾아간 첫번째 취재는 특히나 인상 깊었다. 활동가가 살았던 고향 일대는 카지노 영업지로 변한 지 오래였다. 기업형 전당포와 호텔, 고깃집이 즐비한 곳에서 1980년대 탄광촌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탄광촌은 돈이 만들어지던 곳이었잖아요. 그런데 과연 그 돈이 서민들에게 갔을까요? 광부들은 막장에서 일하다 밖으로 나와 ‘빛만 쐬면 돈이 사라진다’고 말하기도 했대요. 돈은 노동자가 아닌 힘 있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갔을 것이고. 카지노로 변한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카지노로 변한 땅에서 이제는 사라진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광부들은 결국 다 사라진 것일까. 그는 “채굴 노동은 많이 사라졌지만, 태백 탄광촌과 비슷한 일을 하는 곳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탄광촌은 밤에도 불이 안 꺼졌대요. 공장을 돌리려면 전기를 만들 석탄이 필요했으니까요. 노동자들은 산업화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런 곳이 있지 않나요? 구로에 있는 디지털산업단지요. 디지털화된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구로의 젊은 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일하잖아요. 막장에서 석탄을 캤던 광부들과 비슷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화 속에서 교사의 비리를 고발했던 창수는 결국 ‘빨갱이’로 몰려 고향을 떠난다. 만화는 어렸을 적 고향을 떠난 창수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진행된다. “결국 창수가 둘째 누나인 ‘미자 누나’에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가난한 탄광촌의 삶에 창수도 힘들었겠지만, 사실 남자였던 그보다 여자이기 때문에 오빠와 남동생에게 모든 걸 양보한 미자 누나의 삶도 참 기구하거든요.”

삼성 백혈병 문제부터 용산참사까지 사회적 사건들을 소재로 다루다 보니 김 작가의 만화는 그림보다 내용이 더 주목받았다. <너는 검정>은 태백 탄광촌의 모습이 배경이라 이곳의 쓸쓸한 모습이 풍경화처럼 전달된다. 전작보다 그림이 주는 감동이 좀 더 크다는 느낌이 든다. “그림은 특유의 서정으로 리듬이나 뉘앙스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날리는 석탄가루, 술 먹고 싸우는 어른들의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갑자기 스토리에 집중하긴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집중할 시간을 벌어두는 거죠.”

차기작은 ‘여성 버디물’이라고 했다. 문제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보냈던 따뜻한 시선은 이번에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 백혈병 문제도 용산참사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죠. 사회는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빨리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무언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편하게 낙관할 것도 아니지만, 비관할 일도 아니라고 보는 거죠.”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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