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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Why] '미투'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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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의 순간 속으로]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라는 로빈 월쇼의 책이 있다. 무려 1982년 미국 32개 대학 6000여 명 남녀 대학생의 경험 분석을 통해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 다룬 두꺼운 책인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화두들이 우리나라에는 최근에야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나 역시 얇지 않은 이 책을 보면서 나와 내 몸에 일어났던 일을 직시하게 됐다. 이를테면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지면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게 됐지만, 한동안 극장의 영화 스크린은커녕 영화 포스터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푹 숙인 고개로 땅바닥만 쳐다보며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라는 단어의 획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저몄다. 그렇다, 이것은 나의 '미투' 이야기다.

조선일보

#metoo. 오랜 시간 숨겨온 아픔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앞선 미투를 보고 용기를 얻는다지만 그 결과는 두렵다. 들불처럼 번진 미투 속에서 나의 미투는 별일 아닌 것처럼 묻혀버리는 것도 겁난다. 필요한 건 #withyou. 용기 낸 고백을 들어주는 것./ 플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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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무렵 삶은 간단치가 않았다. 과대표였던 캠퍼스 커플 남자친구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꼭 어른처럼 보였다. 그는 내게 큰돈을 빌린 채 갚지 않았고, "갚아봤자 네 옷 사고 신발 사는 데나 쓰지 않겠느냐"며 이상하게 당당했다. 과에는 말이 이상하게 퍼져 결국 나는 휴학을 했고 교수님에게 중재를 부탁하겠다는 최후 수단을 쓰고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어느 중견 영화사를 통해 모 감독을 소개받아 함께 시나리오를 개발하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완전히 밀려나 고립되어 버린 상황에서 '입봉'은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당당한 핑계가 되어 줄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데뷔를 하고 싶었다. 감독을 자주 만나야 했다. 감독은 30대 초중반의 유부남이었고 인간성 좋은 사람으로 주위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나 역시 그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 간에 일어나서는 안 될 것 같은 '터치'가 수시로 일어났는데, 어느 순간에 화를 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거절하기도 두려웠고 거절하지 않는 것도 두려웠다. 내가 데뷔에 목숨을 걸수록 그의 손길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는 최근의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관계를 연애 감정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몰라 괴로웠고,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조용한 모텔을 잡아 주는 영화판의 관례대로 모텔에 들어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감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그리로 가도 되냐는 거였다.

다시 번민이 시작됐다. 시나리오 개발을 하자는 것일 수도 있는 데다 그를 딱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애써 일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준비했는데, 객실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들어온 그는 술 냄새를 풍기며 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몸을 더듬었다. 온 힘을 다해 풀려난 후 어찌할 바를 몰라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2차 가해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녀는 "내 남자친구가 그러는데, 그 사람이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데?"라고 말했고, 나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영화사 직원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그 여성 PD는 "그러게 감독님에게 꼬리를 치더라니…"라고 말했다. 그 이후 그 발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자 "조그만 게 잘해줬더니 이젠 박박 기어올라?"라고 답했다.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신속하게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퇴출됐고, 그 감독은 지금도 차분히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영화판을 떠나 조그만 회사에서 일할 때 그때의 나처럼 스무 살이던 막내 직원이 팀장에게 모텔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다. 나는 남자 직원들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기 위해 경찰서로 따라갔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지켜줄 필요는 없었다. 내 스무 살 당시 영화사 관계자들은 모두 대학 시절 정의로운 운동에 몸을 담은 사람들이었고, 명문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에 재직하는 고졸 직원 두 사람의 처신이 훨씬 품위 있었다. 그들은 막내 직원에게 가장 먼저 "네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직원의 편에 설 것을 다짐했다. 문제를 일으킨 팀장이 그 두 사람과 절친한 사이였는데도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범죄 피해자가 문제를 잘 해결하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관계된 남자들의 인품이 훌륭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저 운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그 회사에서 회식이 있던 어느 날, 부장의 손이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등에서 시작해서 허리로 슬금슬금 손이 와서 이리저리 피해도 계속됐다. 조명이 컴컴한 데다 인원이 많아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나 혼자 어둠 속에 얼굴이 벌게진 채 과일 안주 접시라도 엎어야 하는지, 손을 잡아서 꺾기라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얼굴만 계속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다가 결국 가방을 집어들고 모두에게 인사도 제대로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며칠을 혼자 고민하다가 같은 팀 남자 직원 두 사람에게 의논을 했다. 부장의 손장난을 털어놓자 그들은 정의로운 얼굴로 나를 마구 야단쳤다. "김현진씨 정말 실망이에요. 용감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서 화를 냈어야죠.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했어야죠. 현진씨는 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에요." 나는 순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빌어야 하나? 이런 성적인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악을 써도 "평소에 네가 꼬리 치던 행실을 보아하니 그런 일 있을 줄 알았다"라는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일단 참고 나중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의논하면 "진작에 왜 안 돼요, 싫어요 하지 않았느냐"고 또 비난을 받았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지금도 수많은 여성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 고뇌하고 있을 것이다. 왜 이제야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야, 그것도 많은 고통을 삼켜가며 털어놓는 것이 미투 피해자들의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내 몸을 누가 함부로 할 때의 모욕감과 고통의 기억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캄캄하고 슬픈 길인지 안다면 감히 '공작' 같은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찌르는 듯한 고통을 꺼내어 전시하며 공작 행위를 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이 고통 앞에는 진영이 없다. 진보도 보수도 없다. 미투는 절대로 섹스의 기억이 아니다. 미투를 섹스, 그리고 섹스 스캔들로 이해할 때 미투 피해자는 다시 한 번 고립된다.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고통의 기억이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겨우 다시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모든 미투 피해자들 역시 삶을 회복할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고통만 이어지기에는 우리의 남은 인생이 너무나 길다.

[김현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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