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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김정은 핵무기 없애면 한국형 원전 지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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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원전’에 노무현 집념 서려

94년 신포 경수로 때 격정적 여론전

“러시아·미국형으로 창씨개명 No”

문재인·트럼프·김정은 연쇄회담

핵 가진 두 나라에 먹힐 수 있어

북한엔 매력, 미국도 눈치 보는

선제적 원전 제시로 주도권 쥐길

핵무기 완전·철저 소멸이 대전제

주한 미군, 한·미 동맹은 손 안 대야

신포 원전 재개, 스마트 원전 14개

“한국이 북한 어둠 밝히는 빛 되자”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한국 소프트파워로 미·북 하드파워 돌파하기

북한의 핵 제거 문제는 2018년 국제사회의 가장 큰 관심사다. 이 봄에 김정은과 문재인·트럼프의 연쇄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세기의 이벤트가 될 것이다. 회담 결과에 따라 펼쳐질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① 잘되면 평화 ② 안 되면 전쟁 ③ 이상하게 꼬이면 가짜 평화. 가짜 평화는 핵폐기가 아닌 동결조치에 합의 하는 것으로 한국이 북한의 핵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태를 뜻한다.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핵무기만 없애고 한국을 협박할 핵무기는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다. ③의 경우는 앞의 두 시나리오에 비해 발생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핵 담판에서 핵을 가진 두 나라(미국과 북한)가 핵 없는 나라(한국)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올림픽 이후 세상의 온갖 비난과 회의 속에 경이로운 외교적 성취, 놀라운 반전을 이뤄냈다. 이 정부한테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메인 게임은 막 시작됐다. 정의보다 이익을 챙기는 국가 관계, 그 진실의 순간에서 하드파워를 보유한 미국과 북한이 중매를 서줘 고맙다고 한국을 좀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다시 미국·북한이 따라오지 않고는 못 배길 지렛대를 우리가 새로 고안해 내야 할 이유다.

중앙일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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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월 연쇄 정상회담에서 핵무기 하드 파워를 보유한 김정은·트럼프에 맞서 문재인 대통령이 가진 무기는 주도권과 자금력이다. 주도권·자금력은 상대적으로 소프트파워에 속한다. 주도권은 충돌판에서 대화판을 끌어낸 문 대통령의 정성과 선의에서 나왔다. 자금력이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된 것은 기본 경제가 받쳐 주는 데다 힘 없으면 돈이라도 내야 하는 세상 원리와 관계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지원군에게 군량미를 조달해야 할 책임은 조선에 있었다. 이 몫을 다하지 못하면 명나라는 아예 일본과 손잡고 조선국을 반씩 쪼개 분할 통치할 참이었다. 약자라도 주도성이 없으면 더 우습게 보고, 돈이 없는 약자는 더 짓밟히는 게 국제 관계의 최종적 진실이다.

북한 핵 문제의 세 가지 예상 경로 가운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잘되면 평화’라는 ①번 시나리오뿐이다. 다른 경로는 허용할 수 없다. ‘안 되면 전쟁’이라는 ②번도, ‘이상하게 꼬이면 가짜 평화’라는 ③번도 수용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반면에 미국과 북한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③번을 선택하는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도, 가짜 평화도 피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세 명의 지도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다. 청와대 안팎의 소식통들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어차피 써야 할 소프트파워를 머뭇거리지 않고 선제적이고 충분하게 사용할 각오라고 한다.

①번 시나리오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김정은이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할 의지와 실천력을 트럼프한테 증명해 보이고, 트럼프가 김정은이 믿을 수 있게 선제공격 포기를 포함해 명실상부한 북한 체제 보장책을 제공하는 게 필수 조건이다.(체제 보장 목록에 미군 철수, 한·미 동맹 해체가 올라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미국과 북한이 군사 외교적으로 필요한 하드파워를 교환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필수 조건은 북한의 경제적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한국이 소프트 파워 즉, 주도성과 자금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북한 경제 결핍의 근원은 에너지 문제다. 김정은이 핵무기 체계의 완전하고 철저한 소멸을 전제로 미국에 안보를 보장받고 한국에 에너지를 보상받을 때 진짜 평화의 길이 열린다.

‘에너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에너지를 지켜 나라를 지키자’는 금언이 있다. 한국이 북한에 어떤 에너지를 어떤 자세,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공급하느냐는 북핵 해결 이후의 세상을 인도할 등대가 될 수 있다. 북한의 밤은 어둡다. 야경이 어두울 뿐만 아니라 산업용·평화용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주민의 먹고살기가 지속가능하지 않다.

한국이 북한의 어둠에 빛을 비추는 최초의 국제 행동은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였다. 그때의 합의 내용도 지금 추진되는 것과 비슷하다.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이 체제를 보장하고 경수로 원전을 보상한다는 3각 구조다. 그때와 다른 것은 제네바 합의 때 서명국이 미국·북한 양자이고 지금은 한국이 들어가 3자가 되리라는 점이다. 제네바 합의 때 한국은 미국의 부속 지위에 불과했다. 그래서 북한에 공급할 경수로 원전 노형도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려 했다. 원전 짓는 돈도 한국이 70%, 일본이 30%를 대라고 할당했다. 미국은 중유만 제공하고 돈을 안 냈다.

중앙일보

이철 전 의원(左), 노무현 전 대통령(右)


미국 정부가 북한에 러시아형이나 미국형(웨스팅하우스 모델) 경수로를 넣으려 하고 한국 정부는 힘에 눌려 목소리를 못 내고 있을 때 정치권에서 격렬하게 저항한 주인공은 노무현·이철·유인태였다. 그들은 의석이 10여 명밖에 안 되는 군소 야당 이른바 ‘꼬마 민주당’의 정치인이었다. 94년 7월 6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철 의원은 “미국이 한국의 기술로 북한 경수로를 짓는 것은 반대하면서 한국에는 자금만 부담시키려 한다”고 폭로했다.

같은 시점에 노무현 민주당 최고위원은 대전 원자력연구원에서 한국형 원전을 개발했고 대북 경수로 지원단장을 맡아 정부 협상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이병령 박사를 서울 여의도의 맨해튼 호텔(현재는 렉싱턴 호텔)로 몰래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이 박사에게 “지금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데 한국형 원전으로 북한에 구멍을 뚫어야 하지 않겠느냐. 남북 간 교류의 창구를 미국의 글로벌 회사가 독점하는 건 곤란하지 않으냐”고 격정적으로 설파했다. 이 박사는 노 최고위원에게 “수많은 물자와 인원이 흘러가는 거대 사업이다. 지금 한국·미국·일본 3국 협상이 진행 중인데 반드시 한국형 경수로를 채택해 한국의 돈과 기술, 인력과 부품이 북한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꼬마 민주당 3인의 활발한 활동은 “한국형 원전을 러시아나 미국형으로 창씨개명시킬 수 없다”는 여론을 일으켰다. 김영삼 정부를 일깨우고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러시아형을 선호했던 북한과 자국형을 고집했던 미국은 결국 한국형을 받아들여야 했다. 작은 기적이었다. 94년에 시작돼 30% 건설 공정이 진행되다 2006년에 중단된 함경남도 신포의 한국형 경수로 사업의 이면엔 이처럼 한국인의 자금력과 주도성이 결합한 소프트파워가 작동했다. 스토리를 써내려간 주인공들은 주어진 국제 환경에서 한 치라도 더 한국적 주도권을 확보해야겠다고 악착같이 달려든 원자력계·정치권·여론이었다.

세상에 거저 생기는 건 없다. 94년에 비해 더 큰 주도권과 자금력을 확보한 문재인 정부는 한국형 경수로를 격정적으로 옹호한 노무현의 집념과 전략관에서 교훈을 얻기 바란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이 있다. 유능제강(柔能制剛·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이란 말도 있다. 비록 한국형 원전이 북한의 핵무기 능력이나 미국의 선제공격력에 비해 부드러운 꼬리 같아 보이지만 선제적이고 창조적이며 충분하게 활용하면 몸통을 흔들 방법이 전혀 없지도 않다.

북한이 장기적 에너지 공급 측면에서 한국에 의존하게 하고, 미국이 북한의 변덕을 달랠 자금 지원 문제에서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보게 할 전략안이 마련돼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에 한국형 경수로를 다시 공급하기로 방향을 잡아 30% 짓다가 만 신포에서 나머지 70% 공정을 완성시킨다는 식의 구상안을 먼저 던지는 식이다. 지금 이 정부의 누가, 어떤 부서에서 이런 구상과 작업을 하고 있을까.

세계원전수명관리학회장인 황일순 서울대 교수는 신포에 첨단 한국형 대형 원전(1400㎿)을 짓는 것과 함께 북한 내 여러 도시에 한국형 스마트 소형 원전(100㎿)을 하나씩 지어 주자고 제안한다. 스마트 원자로 공급론은 처음 나온 아이디어다.

스마트 원전의 장점은 소형 원자로가 전국 곳곳에 분포돼 있기에 막대한 예산이 드는 송전선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사고가 날 경우 자연 대류에 의한 냉각 속도가 빨라 더 높은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도 한다. 북한엔 14개 산업단지가 있는데 평양·남포·송림·개성·해주·안주·신의주·강계·나진·선봉·청진·김책·함흥·원산이 중심 도시들이다. 이 도시에 스마트 원전을 하나씩 공급하면 북한의 어둠과 전력난이 일거에 해소될 것이다.

“인민들의 허리띠를 더는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2012년)고 떠들던 김정은에게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시가로 대형 원전 1기의 건설 비용은 대략 5조원, 스마트 원전은 약 1조원이라고 한다. 산수적으로 계산하면 신포 대형 원전 2기와 북한 전역의 스마트 원전 14기 건설 비용은 24조원이 나온다.

대형 원전 건설 기간을 평균 8년(스마트 원전은 4년)으로 잡는다면 한국은 매년 3조원을 대야 한다. 현재 일본도 동아시아 지각 변동에 소외되지 않기 위해 대북 보상을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하니 그들에게 비용의 절반을 물려도 좋을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 돈은 연 1조5000억원으로 확 줄어든다. 이 정도면 검토해 볼 만하지 않을까. 김정은이 핵무기를 없애면 북한에 한국형 원전을 지어주자는 방안 말이다.

◆ 취재에 도움 주신 분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김병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 이철 전 의원, 이병령 박사, 김창영 전 총리실 공보실장, 김민석 전 국방부 대변인, 황일순·주한규 서울대 교수(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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