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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사연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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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사연을 글로 풀어내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말,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로도 부족하다는 이 말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유장하고 웅숭깊을 수 있는가를 뜻하지만 삶을 소설로 풀어내기가 생각처럼 여의치 않다는 뜻으로 새겨들을 수도 있다.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삶을 살아왔는데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자신의 사연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온전히 소유해 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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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설은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며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주된 내용인 소설이다. 사소설이 하나의 장르를 뜻할 때에는 일본의 특유한 소설 형식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사소설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다자이 오사무이고 그의 딸인 쓰시마 유코 역시 현대 일본 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 소개된 쓰시마 유코의 작품 가운데 <욕실>이라는 단편소설에는 작가인 유코라 여겨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중학생인 유코는 어느 날 방과 후에 오빠가 입원한 병실에 들른다. 오랫동안 감기로 누워 있던 오빠가 입원한 거였다. 그러나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유코는 오빠가 죽었음을 직감한다.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이미 가슴 깊은 곳에서 알아차렸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가서도 유코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는 개와 장난을 친다. 그런 유코에게 숙모가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오빠가 죽었다, 하고는 울음을 터뜨린다. 유코도 죽은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고 장례까지 치르지만 그러는 내내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모르는 체하기. 여기에는 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유코가 오빠의 죽음을 직감했음에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유코가 어리기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주변사람의 단정적인 언행 탓에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벗어나 나 자신이 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욕실>에서도 유코의 회한은 그 지점을 향하지만 또 다른 단편 <슬픔에 관하여>에서는 그런 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은 실제로 어린 아들을 잃은 유코가 아들의 죽음 이후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유코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위로와 동정이 아무리 예의 바르고 인간적이라 해도 결국 슬픔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그 슬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잘 보여준다. 내가 느끼는 슬픔, 기쁨, 괴로움, 외로움 등은 나의 것이기에 누구보다 절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의 감정에 몰두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위로의 말에 고맙다거나 괜찮다고 대답해줘야 하고 내 감정을 타인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억눌러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감정은 설령 이미 존재했다 해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실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감정과 감정에 대한 반응에도 시차가 있을 수 있으므로 때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모른 척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감정이란 사적인 것이기에 박탈당할 수 없다고 간주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순수하게 홀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도 그와 똑같이 맞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 가운데 누구의 것이 더 소중하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연이 반드시 글이 될 필요도 없고 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것과 사연을 온전히 소유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내가 살아온 이 신산한 삶이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건 내 삶이 아닌 셈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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