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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미투, 소중한 야단법석 / 조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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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새로운 미디어가 ‘미투’(#Me Too)의 전세계적 확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대해 나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페이스북, 카카오 등 대형 플랫폼과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 의존형 미디어가 급증하면서, 참아왔던 분노를 표출할 장은 넓어졌고, 이 분노를 검열하는 권력의 입지는 좁아졌다. 언론사 데스크에서 일방적으로 사회 이슈를 선별하고 편집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과거라면 정치·경제면보다 ‘부차적’인 사회·문화면에 싹둑 잘린 채 실렸을 사안이 북핵 문제나 이명박 소환과 함께 공론화되는 시대가 열렸다.

누군가는 ‘중대한’ 문제를 희석시킨다며 당혹해하지만, 누군가는 인간됨에 관한 고민이 ‘국민’의 관심사와 별개로 취급받는 현실을 낯설게 보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온라인 접속을 광장의 결속과 대조하며 우울한 전망을 내비쳤지만, 해시태그로 연결되는 디지털 연대 덕분에 누군가는 처음으로 아픔을 나눌 동료들의 존재를 실감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미디어는 피해자가 죽을힘을 다해 토해낸 말들에 대해 우리가 예의 있게 화답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가해자가 잘못을 깨닫고 법적·도덕적 책임에 화답하는 시간, 피해자의 고통을 묵살한 한국 사회를 성찰하는 시간, 무심코 내뱉었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는 충분한 시간을 갖기란 요원해 보인다. 트래픽(서버에 전송되는 데이터의 양)이 광고수익과 직결되니 자극적인 후속 기사들이 쏟아지고, 검증되지 않은 뉴스들이 특종이 되어 포털 메인을 장식하면서 이해와 공감은 혐오와 적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신속하고 처절한 응징이 소셜미디어 전쟁의 주요 무기가 된 사이, 미투의 ‘공작’과 ‘변질’을 논하면서 새로운 고지를 점령하는 무리들도 등장했다. 이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의 아비규환이라며 조롱하는 구경꾼도 등장했다. 자극적인 공방에 넌더리가 난 방관자들은 접속을 해제하고 전장에서 사라졌다. 용기를 냈던 성추행, 성폭력 피해자들은 그사이 온갖 가십과 협박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서지현 검사의 미투 선언부터 현재까지 불과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이다. 솔직히 어떻게 끝날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헌법까지 고쳐가며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집권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동요가 없는 중국 사회를 보면서, 민주화 과정을 거친 이 작은 분단국가에서 벌어지는 야단법석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된다. 5·4운동 당시 글 청탁을 받은 루쉰은 중국인을 창문 하나 없는 무쇠 방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로 비유했다. “그들은 잠을 자다가 죽으니 고통을 느낄 수는 없을 걸세. 그런데 자네가 소리쳐 깨운다면 고통 속에 죽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닐세. 몇몇 사람이 깨어났으니 무쇠 방을 무너뜨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네.” 중국의 현대사를 되돌아봤을 때 위선과 부조리에 맞서 “깨어난” 사람들은 부지기수지만, “무쇠 방”이 무너졌는지는 의문이다.

혁명 정당의 역할을 포기한 공산당이 국가권력의 통치기제로 군림하면서 발화의 자유를 시장의 자유로 대체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그사이 제 발로 무쇠 방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잠가버린 사람들도 많아졌다. 인터넷 통제망을 우회하여 홍콩, 대만 뉴스를 보며 제 나라 소식을 접하는 중국 지인들은 한국의 미투 운동에 대해 부럽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이 운동의 경과가 얼마나 혼탁한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전하지만, 이 야단법석의 장이 소중한 것만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물론 새로운 미디어의 연금술을 지혜롭게 활용하고, 오프라인에서 긴 호흡의 공론장을 만들면서 소중함을 지켜내는 일은 모두의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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