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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배우 조수향 "제 연기의 원천은 `내적 결핍`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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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연배우다-9]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늘 결락감(缺落感)을 머금으며 산다. 그것은 때때로 외로움이 되고, 쓸쓸함이 되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출처 모를 슬픔이 된다. 헤어나오려 자맥질해봐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라고 태어난 종족이기 때문이다. 시인 백석이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詩 '흰 바람벽이 있어' 중)고 쓴 것은, 그 또한 이 숙명을 직시해서였을 것이다.

최근 박석영 감독의 '들꽃'(2014)을 다시 보면서 배우 조수향(27)도 그런 종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연기한 수향(조수향)이라는 소녀의 깊이를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워 보였다. 박 감독의 '꽃 3부작' 첫 편인 '들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카메라처럼 세파에 흔들리는 불안한 세 소녀를 지켜보는 영화다. 하룻밤 잘 곳을 찾아 헤매이다 거친 사내들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갖은 폭력에 시달리는 이 참혹한 이야기의 중심엔 조수향이라는 배우가, 그가 연기한 열일곱 살 소녀가 있다.

극 중 수향은 질퍽한 늪과 같은 세상의 흉한 몰골을 이미 온몸으로 겪어낸 듯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한 살 아래 소녀 하담(정하담)을 향해 생긋 웃으며 "나 예쁘지"라고 말할 때엔 그 나이대의 귀여움이 여실히 묻어난다. 그러나 극이 점점 무르익어가면 또 다르다. 부박한 현실에 짓눌린 약자의 불안과 두려움이, 분노와 슬픔이 앳된 얼굴 이면으로 서서히 발화되는 것이다. 그 이물감 없는 연기의 밀도가 놀라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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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수향 / 사진=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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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물 둘에 불과했던 배우가, 그것도 자신의 장편 데뷔작에서 이 같은 연기를 선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조수향은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던 그를 향해 대선배 김희애는 이 같은 상찬을 건넨 바다. "수향이를 보며 저 또한 큰 자극을 받았어요. 정열과 호기심이 가득한 배우예요.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돼요."

조수향의 이후 행보는 상업과 비상업, 대중과 순수, 주연과 조연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후 여러 편의 TV 드라마를 찍어 대중의 눈도장을 받기 시작했고, 미스터리 스릴러 '검은사제들'(2015), 장현상 감독의 독립영화 '사돈의 팔촌'(2015), '커피 느와르:블랙 브라운'(2017) 등에 출연했다. 최근엔 이승기·심은경 주연의 사극 '궁합'에서 궁녀 만이로, 오는 22일 개봉작인 전고운 감독의 독립영화 '소공녀'에 조연 출연한다.

지난달 26일 서울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샛노란 개나리꽃 색감의 원피스를 입은 조수향은 "천성적으로 '마음의 결핍'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결핍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어요. 집안 환경이 좋고 나쁘고 그런 게 꼭 아니더라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결핍이 어릴 때부터 유독 많았던 것 같아요. 그게 연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수향 씨만의 독특한 연기의 원천은 아닐까요.

"그런가요. 음, 저는 지금도 주변에서 저를 배우로 불러주실 때 '네 맞아요'라고 선뜻 말하지는 못하겠어요. '저는 배우예요, 배우 조수향이에요'라고 말했더라도 그런 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이 내심 들거든요. 자존감이 낮은 걸까요. 무의식에선 나만의 자존감이 없진 않겠지만요. 하지만 뭐랄까요. '나는 배우야' 하고 내세우고 싶진 않아요. 그저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런 마음가짐 덕에 인물에 더 깊이 들어가는 거겠죠.

"그런 거라면 감사하죠. 저는 자기 색깔을 강하게 가져가는 배우가 있고, 그 색깔을 지우고 가는 배우가 있다고 봐요. 극단적으로 볼 때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제 색깔을 어필하는 데 자신이 있고 그런 능력이 정말로 있다면 전자처럼 했겠죠. 하지만 저는 왜인지 그런 게 불편해요. 그저 저한테 주어진 배역에 저를 최대한 맞추는 게 보다 편하게 다가와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조금 더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일지를 궁금해하고 관찰하고 싶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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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수향 / 사진=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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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도 그랬나요?

"글쎄요, 제가 생각하는 저의 어린 시절은 자존감이 정말 낮았던 것 같아요. 항상 위축되어 있었고, 무언가 열등감이랄까,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고…."

-무엇에 대한 자격지심이었을까요?

"그냥, 끼가 많고 다재대능한 또래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다보니 '나는 그렇지 않아'라는 단정 아닌 단정을 일찌감치 했던 것 같아요."

조수향이 연기를 처음 경험한 건 2006년. 푸르디 푸른 한양여중 1학년 때였다. 하굣길에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을 받게 됐다. "여중에만 있으니 지루했다"던 사춘기 소녀는 순간 호기심이 일었고, 그날 저녁 아빠에게 조르고 또 졸랐다. 그렇게 연기학원을 겸한 조그만 엔터테인먼트사에 들어가 봉태규 주연의 '방과 후 옥상'(2006)에 단역 출연한다. 주어진 역할은 '궁달반 아이들1'. "단역이라고도 할 수 없는 엑스트라 수준이었다"고 했다. "연기라는 생각보다 어린 마음에 놀러간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폐교에서 찍었는데요. 매일 친구들과 떠들고 놀고 하는 재미가 컸어요. 초코파이, 율무차가 전부 공짜였고요(웃음)."

-그때 경험이 안양예고에 가는 데 작은 계기가 되었겠네요.

"그것보다, 예고가 교복이 참 예뻐요(웃음). 그게 좋아서 들어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연기에 관심은 있었으니 연극영화과에 들어갔겠죠. 그런데 막연한 관심 정도였어요. 처음 들어가니 이미 연극이나 뮤지컬에 단련된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저는 아예 문외한이었고요. 그냥 연예인 하고 싶어서 들어가는 거겠지 했는데, 막상 가니 이미 연극도 하고 있고 뮤지컬도 하고 있고 전부 끼도 많고 노래도 참 잘하고. 이런 친구들 사이에 있으니 '나는 별 다른 열정 없이 왔구나'하며 움츠러든 거죠."

-예고도 선행학습을 하고 오는군요.

"그럼요, 정말 위축됐어요. 선생님이 뭘 보여주시면 이미 다 알고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지킬 앤 하이드' 같은 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뮤지컬이었는데 친구들은 이미 전부 보았대요. 그런 게 신세계였어요.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스스로를 뽐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 보였고요. 그리고 다들 예쁘고 잘생겼거든요. 거기서 '아, 나는 좀 아니구나' 했죠(웃음).

-한마디로 '백지상태'였네요. 첫 무대는 언제 올랐어요?

"고교 1학년 12월 20일이요. 고(故) 함세덕 작가님의 '동승'이라는 작품이었어요. 준비된 게 없으니 말씀처럼 새하얀 '백지상태'였죠. 저희 조가 12명 정도였어요. 원래 남자아이가 주인공인데 운 좋게도 제가 어린 외모라고 친구랑 더블캐스팅으로 주인공을 했어요. 지금도 작품 처음 올리던 그날 새벽녘의 기억이 새록새록해요. 안개 자욱한 언덕배기를 걸어가던 그 강렬한 느낌이요. 일찍 준비해야 하니 아무도 없는 어두운 새벽길에 등교한 거였어요. 근데 정작 무대에서 뭘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너무 떨려 했기도 했고, 꿈 꾸듯이 금세 지나가기도 했고요."

-그날 이후 연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게 있나요.

"당시 선생님이 '여기(연극계)는 정글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정글이 자아내는 이미지는 잘 모르겠고, 그저 '힘들구나'라는 느낌만 어렴풋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날 공연 이후 '난 배우가 되겠어' 하고 꿈을 머금은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색다른 경험이었던 건 분명해요. 연기에 대한 욕심도 그때 이후 처음 생겼던 것 같아요."

연극 너머 영화로까지 관심의 더듬이를 벼린 건 고교 졸업 즈음. 영화과 친구들이 올린 졸업영화제를 보러 간 것이 계기였다. 매일같이 밥을 먹고, 웃고 떠들던 친구들을 화면으로 보는 일이란 진기한 경험이었다. 그때 처음 "나도 저런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국대 연극과에 들어간 후 차근차근 단편 영화 출연을 시작한다. 학부 시절 찍은 것만 10여 편. '물음표를 주세요'(2010), '11월月'(2011), '울게 하소서'(2013), '집으로'(2013), '이상한 이야기'(2013) 등이 그것이다. 개중 한은영 감독의 '울게 하소서'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도 초청받았다. 조수향은 "울게 하소서'만큼은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다"며 배시시 웃었다.

-한 편 한 편 어떻게 찍은 건가요?

"인터넷에 '필름메이커스'(영화 정보 공유 커뮤니티)라는 홈페이지가 있거든요. 3년여간 연극만 계속 해와서 영화 쪽은 아는 분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필름메이커스'에 의존한 거죠. 거기서 이런 작품 찍습니다, 메일로 프로필 보내주세요, 하는 글이 올라오면 메일을 보내서 연락을 기다리는 거죠."

-20분짜리 단편 '울게 하소서'가 칸 초창작이었죠. 당시 기사화도 많이 됐고요. 사실 이 영화를 보진 못했어요. 어떤 영화인가요?

"남녀 고등학생이 나와요. 제가 연기한 여자애가 버려진 컨테이너에서 아이를 낳는 상황부터 시작돼요. 이 아기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니 버스정류장에 버리고 와요. 마주한 상황이 두렵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니까. 그러다 남자애가 아기의 탯줄을 자르려면 칼이 필요해서 그걸 사러 나가는 와중에 경찰에 쫓기게 돼요. 그래서 제가 연기한 여자애가 책가방에 아이를 넣고 버스정류장 종점에 두고 오고요. 그러고 다시 남녀가 만나고 아이가 어딨냐고 남자애가 묻고, 그 아이를 다시 찾으러 가는데 도착하니 아이는 이미 죽어 있어요. 굉장히 처연한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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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수향은 자신의 첫 장편 `들꽃`(2014)에서 슬픔과 불안, 우울과 체념이 공존하는 얼굴을 열입곱살 소녀 수향을 통해 탁월하게 연기해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올해의 배우상`을 거머쥐었다. /사진제공=인디플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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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들꽃'(2014)에 출연하셨죠. 이 영화와의 인연은 어떻게 가닿았나요.

"'들꽃'은 참 감사한 영화였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요. 2013년경이었어요. 졸업하자마자 대학로에서 '옐로우 슈즈'와 '햄릿 레퀴엠'라는 연극을 6개월간 몰아서 올리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이런저런 목마름 같은 게 있었죠. '영화를 찍고 싶다, 장편을 찍고 싶다'라는 생각이요. 그래서 틈틈이 '필름메이커스'를 살펴보는데 '들꽃' 주연 배우를 찾는다는 글을 보게 된 거예요. 박석영 감독님이 인물에 대해 참 성심성의껏 설명해주셨더라고요. 그걸 읽으며 감동받기도 했고, 욕심이 나 얼른 연락을 드렸어요. 제 프로필(이름·나이·키·그간 출연작)이랑 전에 찍은 단편작을 보내드렸고요. 그렇게 캐스팅됐고, 한 달 만에 후다닥 찍었죠(웃음)."

-첫 장편인데, 단편 촬영과는 어떤 게 다르던가요?

"길이도 길이고 호흡도 당연히 긴데, 무엇보다 관계가 풍성했어요. 극 중에 하담이도 있고 은수 언니도 있고 말 못하는 바울이(이바울)도 있고, 태성(강봉성)이와 태성이 삼촌(오창경)도 있고요. 제가 연기한 수향도 어느 한 사람이 아닌 이 사람 저 사람과 관계된 캐릭터였어요. 좁은 인간관계가 아닌 보다 발이 넓어진 캐릭터를 경험할 수 있었죠."

-함께 연기한 정하담, 권은수 씨와는 어땠나요?

"정말 다들 신인이고 아무것도 모를 때여서 정신없이 놀고 술도 먹고 그랬어요. 하담이를 처음 보았을 때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해요. 제가 연극 공연하고 있을 때 꽃을 사들고 왔더라고요. 수줍게 공연 잘 봤다고 말하고 가는데 그 모습이 참 예쁘게 인상에 남아 있어요."

-현장에서의 박 감독님은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하셨어요(웃음)."

-당시 연기가 참 인상 깊었어요. 극 중 수향은 언뜻 밝고 명랑해 보이면서도 속에 굉장한 상처가, 생채기가 있는 소녀 같았어요. 그걸 삭히고 또 삭혀서 좀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으려는 친구처럼요. 그 보이지 않는 안간힘을 표현한 것도 놀랍게 다가왔고…. 스스로의 연기엔 만족하셨나요?

"아니요, 하하. 만족은 하지 않았고요(순간 조수향은 양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는 칭찬을 매우 쑥쓰러워했다). 저는 제가 나온 작품을 볼 때마다 그냥 스스로를 토닥이는 편이에요. '아, 저게 최선이었을 거야, 그래, 저게 정말 최선이었을 거야, 다시 돌아가도 똑같았을 거야' 하고요. 제 연기가 완벽하게 느껴졌던 순간은 없어요. 그렇더라도 투덜거리진 않고요(웃음)."

-그럼에도 첫 장편으로 '올해의 배우상'까지 받았죠.

"그냥, 꿈만 같아요. 지금도 내 일 같지 않고요."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인가봐요?

"하는 것 같은데, 하하. 생각보다 큰 사건 앞에선 흔들림이 없는 것 같기는 해요."

저예산 독립영화 '들꽃'이 가져다준 반향은 적지 않았다. 세간에 배우 조수향을 제대로 알리게 한 작품이었다. 안방극장에서 먼저 손을 건넸다. 이듬해인 2015년 KBS1 2부작 드라마 '눈길'(2월 28일~3월 1일)에 출연하게 됐고, 곧바로 KBS2 16부작 드라마 '후아유-학교2015'(4월 27일~6월 1일)에 캐스팅된다.

-'눈길'이라는 단막극이 차기작이었죠. 1944년 일제 강점기 말이 배경인 위안부 소녀 얘기였고요. 상처 많은 소녀 중 한 명이었는데, 자연히 '들꽃'의 수향이 생각나기도 해요.

"유보라 작가님이 극본을 쓰신 작품이에요. 작가님이 '들꽃' 보시고 나서 매니저님 통해 연락주셨던 걸로 기억해요. 위안부를 다룬 작품이기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볼 수 있을까 싶었어요. 사명감까진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내가 해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진 않을까, 진실되게 배역을 소화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어요. 그래서 흔쾌히 응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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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수향은 KBS2 TV 드라마 `후아유-학교2015`에서 학교 폭력의 가해자 강소영을 연기하며 시청자들로부터 연기파 배우로 눈도장을 받아냈다. /사진제공=K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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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방영한 '후아유-학교2015' 인기가 적지 않았죠. 시청률이 8~10%가량 됐고요. 그런데 드라마 데뷔를 학교폭력 가해자로 했네요. 투명스러운 말투, 눈 치켜뜨기, 날카롭게 소리지르기…. 여러모로 강소영은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굉장히 빨리빨리 후루룩 찍었어요. 영화나 드라마나 똑같이 힘들고 잠 못 자고 그런데, 드라마가 조금 더 잠을 못 잤던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잠을 잔다기보다는 졸고 조는 일의 연속이어서 도통 잠을 잔 건지 눈만 잠시 붙인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보냈어요. 초반부에는 그리 힘들진 않았어요. 그러다 중반부 넘어가면서 힘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요구되는 에너지가 많으니까요. 짧은 장면에서도 감정이 부글부글 나와야 하니까. 웃으면서 '이랬니, 저랬니' 하면서 넘어가는 거랑은 다르죠.

-실제로는 정반대 성격일 것 같아요.

"소영이처럼 살면 제가 연기를 못했겠죠(웃음). 그렇다고 제 안에 무조건 착한 부분만 있진 않을 거예요. 저도 화가 날 때가 있고, 짜증을 내고 싶을 때가 있겠죠. 다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것 뿐이에요. 그걸 컨트롤 못하면 소영이 같은 친구가 되는 거겠고요."

-악역이다보니 알게 모르게 주위에서 받은 상처가 없진 않았겠어요.

"그렇죠, 처음엔 상처 많이 받았어요. 드라마 게시판이나 강소영과 관련한 기사 댓글을 보면 '악플'이 장난 아니었거든요. 하루가 다르게 엄청나게 달리던데요?"

-그걸 일일이 다 읽었어요?

"디테일하게 하나하나 다 봤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댓글은 제 구체적인 신상에다 인신공격성 말까지 덧붙인 거였는데, 정말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굉장히 충격적이었겠네요.

"그땐 진짜 제 삶이 위협당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거든요. 바깥에 나가면 누군가 저를 무섭게 쫓아오지 않을까 하는. 한동안 사람 만나는 게 무서웠어요. 지금은 괜찮지만요."

-그간 배역들을 보면 무언가 결핍된 면면이, 내적 어두움이 공통분모처럼 있는 것 같아요. 가출 청소년 수향('들꽃')이 그랬고, 소영('후아유')도 학교폭력 가해자이지만 불우한 가정적 배경이 있고. 그리고 또 10대 청소년들이고요.

"단편 찍을 때부터 어두운 고교생 연기를 많이 했어요. 단편이고 장편이고 깊은 주제를 꺼내다보면 발랄하고 재치 있는 캐릭터보다 그런 이미지의 캐릭터를 맡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보니 결핍이 있는 어찌 보면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더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고민했어요."

-맡은 배역은 어떤 식으로 준비하세요?

"감독님이랑 얘기나누는 걸 선호해요. 드라마는 워낙 바쁘고 정신없으니 그게 어렵지만, 영화에서는 감독님이랑 되도록 많이 대화하는 게 가장 빠르고 좋았어요. 그걸 가지고 상대 배우랑도 소통하고요. '들꽃' 박석영 감독님의 경우엔 오히려 제게 물으셨어요. 이런 부분에선 어떻게 할 거 같으냐는 식으로요. 그렇게 제 안의 뭔가를 찾아주려 하셨죠. 사실은 제가 찾아야 하는 게 맞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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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수향은 KBS2 TV 드라마 `귀신은 뭐하냐`(2015)에 출연해 8년 만에 귀신으로 돌아온 천동(이준)의 첫 사랑 무림(조수향)을 열연했다. <사진제공=K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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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어두운 내면의 소녀만 연기한 건 아니다. 이후 선보인 드라마 '귀신은 뭐하냐'(2015)에선 8년 만에 귀신으로 돌아온 천동(이준)의 첫사랑 무림(조수향)을 열연했다. 무림은 다분히 귀엽고 발랄한 캐릭터였다. 그간 선보인 연기와는 톤이 생판 달라 조금은 힘을 빼고 연기할 수 있었다. 조수향은 "답답하게 옭아매던 느낌에서 드디어 해방된 작품"이라 했다. 이후에도 '세가지색 판타지-생동성 연애'(2017)의 왕소라, '듀얼'(2017)의 박서진 등 이채로운 캐릭터들을 도맡으며 연기 저변을 차근차근 넓혀나갔다.

-한동안 드라마 출연을 많이 했어요. 맡은 캐릭터도 보다 다양해진 느낌이고요. 그만큼 여러 색깔이 소화 가능한 배우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겠죠. 그럼, 그동안 스스로 얼마나 성장했다고 보시나요.

"그런 말씀을 들으면 너무 좋죠, 감사하고…. 저는 굳이 제 자신을 막 강렬하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저를 표현하고 저를 어필하는 걸 잘 못하는 탓일지 모르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다양한 캐릭터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런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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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수향은 장현상 감독의 독립영화 `커피 느와르: 블랙 브라운`에서 어리지만 강인한 내면을 지닌 카페 여사장 김주원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사진제공=피도안마른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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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지난해 장현상 감독님의 '커피 느와르:블랙 브라운'(2017)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도 가게 됐죠. 다시금 독립영화 주인공으로 출연했고요. 블랙 코미디물이라 들었는데 아직 개봉을 안 했더라고요(현재 배급사를 찾고 있는 중이라 한다). 소재가 독특하던 걸요? 국가가 법으로 커피를 금지하면서 벌어지는 이권 다툼기라고.

"현상이 오빠가 찍은 '사돈의 팔촌'(2016) 차기작이었어요. 그 영화에서도 예지라는 인물로 조연 출연했었요. 현상이 오빠가 워낙 재기발랄하고 통통 튀는 매력이 있는 사람인데, '커피 느와르' 시나리오를 참 재밌게 썼더라고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이야기가 많고, 인물 관계가 복잡해서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점점 배우들과 함께 '리딩'하고 이야기를 쌓아가고 하니까 더 재밌어졌어요."

-어리지만 강인한 내면을 지닌 카페 여사장 김주원을 연기했어요. "캐릭터가 나보다 훨씬 큰 인물"이라고 말씀하셨죠?

"극 중에선 어린 나이인데 가게를 운영할 만큼 당찬 친구거든요. 그렇다고 어린 마음에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고요. 제나름 리더십이 있는 캐릭터예요. 사람들을 끌고갈 능력이 있고, 유머도 있고요.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런 내용이에요. 국가에서 시행한 법이 나왔는데 사실 그 배후에 검은 조직이 있는 거죠. 주원의 입장에선 알면 알수록 자기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거죠. 그걸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에피소드가 독특하고 재밌어요."

-그간 맡은 배역 중 가장 세파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처럼 느껴지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 컨트롤을 잘 하는 인간적인 리더십이 있는 여자거든요.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고,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 그런 노력이 엿보이는 캐릭터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만약에 내가 저런 카페 사장이면 정말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에요. 그럼에도 극 중에서라도 그런 역할을 해내니 뿌듯하기도 하고 그런 게 참 멋있어도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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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수향 / 사진=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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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엔 '소공녀'에 조연 출연하셨어요. 몸을 파는 민지라는 여자죠. 좀 푼수데기 같은데 나름의 감추어둔 사연이 있는 여자 같아요.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미소(이솜)가 어지럽혀진 민지 방을 청소할 때 학사모를 쓴 졸업 사진을 카메라가 물끄러미 바라보죠. 그 순간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소공녀'는 집세와 담뱃값이 오르자 집을 나오게 된 미소가 옛 밴드 멤버들의 집을 방문하며 잘 곳을 찾는 이야기다).

"'소공녀' 자체는 서울 도심에서 살아가는 우리 청춘들의 이야기에요. 깊은 공감과 위안을 얻어갈 수 있고요.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져요. 저는 처음과 끝에 등장해요. 조금 센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겠는데, 미소를 묘하게 좋아하는 마음 또한 있는, 보기보다 재미있는 캐릭터예요. 저는 지금껏 연기해온 캐릭터 중 민지가 참 마음에 들어요(웃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만하지 않고, 늘 스스로를 낮춘다. 그 낮음의 자세로 말미암아 편견 없이 세상을 받아들인다. 배우 조수향이 꼭 그런 사람 같았다. 스스로에게 솔직해 보였고, 내세우진 않아도 저만의 아름다운 공화국을 건축 중인 것 같았다. 아날로그적인 것이 좋아 지금도 LP 레코드로 음악을 듣고, 1980년대 가요를 흥얼대며, 고전 영화를 즐겨 본다는 그다.

-고전 영화를 좋아해요?

"엘리아 카잔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7)를 가장 좋아해요. 뤽 베송의 '레옹'(1995)도요. 최근에 본 것 중에선 '라라랜드'(2016)도 좋았고요. 현재로선 이 세 편이 인생영화 3편이에요. 최근에 본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도 참 인상 깊었고요."

-엘리아 카잔이라…. 놀라운데요.

"매번 볼 때마다 경탄하게 되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에요. 보면 볼수록 더 재미있어요. 흑백영화가 이렇게 대단하구나 하고 느끼게 해준 작품이고요. 비비안 리의 연기를 볼 때마다 새로운 면면이 발견돼요. 말론 브란도의 연기도 말로 형언하기 힘든 매력을 줄곧 전해주고요. 정말 과장 없이 100번 가까이 봤어요. '레옹'도 고등학생 때 보게 된 작품인데요. 1학년 때쯤이었나. 지금껏 10번 정도는 본 것 같아요. 숏이나 앵글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그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소녀 마틸다에 감정 이입을 깊게 했어요. 아빠가 죽어갈 때 눈물범벅이 된 마틸다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팠죠. '라라랜드'는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예요. 영화라는 게 이렇게 황홀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느낌이 참 좋았고, 좋은 걸 넘어서서 감사하다는 마음까지 들게 되더라고요."

매일경제

배우 조수향 / 사진=양유창 기자


-혹시 닮고 싶은 배우가 있나요?

"어느 하나 꼽긴 그래요. 나이가 조금 더 들면 할 수 있는 역할도 많아지겠죠. 일단은 그런 역할들을 두루두루 만나보고 싶어요. 그렇게 연기할 수 있는 폭을 넓혀가야 할 테고요. 롤모델은 현재로선 없어요. 매번 바뀌어서(웃음). 굳이 꼽자면 최근엔 샐리 호킨스라는 배우가 참 좋았어요."

-향후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요?

"저는 진짜 약간 보이시한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인물을 꼭 해보고 싶어요. 왜인지 곧 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있긴 해요(웃음)."

-수향 씨의 연기에 대한 평소 마음가짐은 어떤가요.

"저는 저만이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을 거고, 제가 할 수 없는 캐릭터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봐요. 그저 저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마지막으로 물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조금 그늘이 졌다. 아차 싶었다. "행복한 순간은 너무 짧고, 힘든 순간은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더는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그는 지금도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간 연기해온 사연 많고 아픔 많은 여자들처럼. 그 모습이 애처로웠고, 안쓰러웠다. "내가 이것을(연기를), 이 직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늘 있어요. 요즘은 '더는 못 버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간혹 있고요. 그래도 힘을 내야죠(웃음)."

이 글을 매듭짓는 지금, 인터뷰 때 미처 하지 못한 한마디를 이렇게라도 건네고 싶다. "누구보다 잘하고 있어요, 지금처럼만 하면 돼요"라고.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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