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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매 380년 향기에...통도사 봄은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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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처럼 편안한 사찰...솔 향기 쏟아지는 '무풍한송로'도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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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영각 앞마당의 자장매. 한 그루의 홍매화가 마음 급한 상춘객을 불러 모은다. 양산=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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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봄은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서울을 출발할 때만 해도 끄물끄물하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건 충주를 지날 때였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상황은 더 악화돼 상주영천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산과 들을 하얗게 덮은 눈이 도로에도 쌓이기 시작했다. 대구는 3월 기상관측이래 세 번째로 많은 적설량을 기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8일 경남 양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봄비 머금은 자장매, 그윽한 향기 퍼지고

어쩌면 눈송이 고깔을 쓴 설중매를 볼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경주를 벗어나자 진눈깨비는 비로 바뀌었다. 새하얀 세상은 봄날의 꿈처럼 사라지고 통도사에 도착하자 풍경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무채색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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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는 온통 무채색인데, 홀로 분홍빛 흐드러진 통도사 자장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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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 홍매화로 여행객들의 표정도 봄처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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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끝자락 추위가 혹독했던 터라 어느 해보다 봄 소식이 간절했나 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홍매화가 피었다는 영각(影閣) 앞마당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주위는 아직 겨울 색인데 흑갈색 가지에 분홍빛 꽃송이 만개한 홍매화 한 그루가 거짓말처럼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빗방울 머금은 꽃잎과 꽃술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만든 조화(造花)가 아닐까. 나무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둘러선 사람들까지 비현실적이다. 조심스럽게 감탄사를 뿜으며 사진을 찍는 여행객도, 카메라를 받쳐 놓고 때를 기다리는 사진사들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탑돌이하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래서 보고 위에서 보고, 맵시 있는 구석을 찾기 위해 찬찬히 응시하는 눈빛이 사랑하는 사람 보듯 그윽하고 부처님 대하듯 경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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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각 옆에는 산수유도 노랗게 망울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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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고리 형태로 자란 통도사 청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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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머금은 능수매화도 곧 터질 듯 봉오리가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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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는 이 홍매화를 자장매화(慈藏梅花)라 부르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 나무의 나이는 400살을 바라보고 있다. 통도사에서 전하는 ‘자장매’의 사연은 이렇다.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통도사 중창에 나선 우운대사는 1643년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축조하고, 불교계 스승의 영정을 모시는 영각을 건립한다. 상량보를 올리고 낙성을 마치니 마당에 홀연히 매화 싹이 자라나 해마다 음력 섣달에 분홍빛 꽃을 피웠다. 불자들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와 이심전심으로 통했다고 여겨 자장매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380년 가까운 세월에 견주면 나무는 크지 않다. 매서운 추위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다는데, 올해는 그 추위 때문에 개화가 좀 늦었다. 홍매화 옆에는 산수유도 노랗게 피어나는 중이고, 경내에는 능수매화, 흰동백, 청단풍, 금목서 등이 줄줄이 봄 소식을 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통도사, 오래된 사찰이 주는 편안함

자장매 자태와 향기에 흠뻑 취해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통도사는 오래된 절이다.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창건했으니 1,30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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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는 흡사 오래돼서 편안한 한옥마을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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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응진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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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을 위한 봉발탑. 아귀가 맞지 않아 엉성한 모습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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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는 또한 큰 사찰이다. 크다는 것은 단순히 면적과 건물의 규모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우선 법보사찰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이다. 통도사는 석가의 사리를 봉안한 불보사찰이다. 사찰 뒤편의 영축산도 석가모니가 불법을 설파한 인도의 산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 통도사는 또 참선수행을 위한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교육기관인 율원( 院)을 모두 갖춘 총림(叢林)이다. 총림 사찰은 전국에 8개가 존재한다. 국보와 보물을 비롯해 문화재만 80개를 보유하고 있고, 대웅전이 따로 있음에도 작은 절에서 그 역할을 대신하는 극락전, 관음전, 광명전 등을 두루 갖춰 사찰 백화점으로도 불린다.

이 정도면 속된 말로 불상과 전각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돈 자랑’이 묻어나기 마련인데, 통도사에는 오히려 오래된 절간이 주는 편안함과 소박한 기품이 느껴진다. 40여채의 전각은 어느 것 하나 외관이 도드라지지 않고 단아하다. 그래서 불자가 아닌 방문객은 한옥마을에 온듯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단청과 벽화도 색이 바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건물이 많다. 응진전을 비롯한 일부 건물은 맨눈으로도 기둥이 기울어진 것처럼 보여 스러지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다. 용화전 앞 봉발탑 역시 탑신이 살짝 기울어지고 그릇 뚜껑도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오히려 친근하게 보인다. 봉발탑은 미래의 부처, 미륵불을 위한 밥그릇을 형상화한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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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너머로 보이는 금강계단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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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 剛戒壇)만은 근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넓은 사각 기단 한 가운데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보관하고 있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볼 수 밖에 없다. 대웅전과 산령각 사이 담장에 서면 사리탑만 동그랗게 솟아있어 더 신비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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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경내에 이르는 ‘무풍한송로’. 솔 향기가 쏟아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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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풍한송로 바위에 새겨진 옛날식 인증샷, 혹은 인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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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계곡을 다녀간 이들의 이름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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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입구에서 경내에 이르는 솔숲 길은 자체로 훌륭한 산책로다. 1km가 넘는 넓은 흙 길 양편으로 멋들어지게 휘어진 소나무가 호위하고 있다. 맑은 솔바람과 청아한 계곡 물소리가 어우러져 20여분이 짧게 느껴진다.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라 이름 붙인 이 길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마차를 타고 여흥을 즐기던 곳이었고, 오랜 옛날에는 풍류객의 사랑을 받은 곳이었다. ‘인생사진’의 옛날 버전이랄까, 길가의 바위란 바위에는 빈틈없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요즘의 ‘핫플레이스’ 못지않게 자리다툼도 치열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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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 머무르는 절, 홍룡사 홍룡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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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에서 멀지 않은 홍룡사는 사찰 자체보다 폭포가 유명하다. 사찰 옆 바위 절벽에서 3단으로 떨어지는 홍룡폭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비가 올 때마다 사람들이 몰린다. 특히 관음전 옆으로 떨어지는 23m 높이의 상단 폭포가 일품이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생긴 물보라와 무지개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에 비유된다. 애초에 낙수사( 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 홍룡사가 된 것도 이 폭포와 무관치 않다. 부르기 쉽고 이해하기 편한 대로 한글로 ‘홍룡사’라 하지만, 일주문에 적힌 정식 명칭은 무지개가 머무르는 사찰, ‘홍롱사(虹瀧寺)’다.

양산=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