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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성폭력 연루 공연 볼 수 없다” 보이콧 나선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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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등 직접 가해자뿐 아닌

묵인ㆍ방조 추정 관계자 공연까지

“예매 취소” 인증 잇따라

‘위드 유’ 운동으로 번지는 파장

주요 관객층인 30대 여성 주목

일부 팬은 25일 대학로서 집회도
한국일보

이윤택 연극연출가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연극계 미투 운동으로 밝혀진 자신의 성추행 등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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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취소하는 게 씁쓸하지만 도저히 공연을 볼 자신이 없어서 예매 취소했어요.”

이번엔 관객들이 나섰다. 연극계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 운동’이 확산되면서 성추행 등 성폭력 가해자가 출연하거나, 스태프로 참여한 공연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공연 마니아들이 늘고 있다. 집회를 열어 공연계 성폭력 피해자를 응원하려는 관객들도 있다.

최근 연극 뮤지컬 등 공연계 팬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엔 자신의 예매 티켓을 취소했다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 22일 현재 수십 건의 ‘인증글’이 게재돼 있다.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티켓 전쟁’을 치러가며 힘들게 얻은 인기 공연인데도 취소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 달에 한 번은 공연장을 찾는다는 직장인 이모(29)씨는 “무대 위 배우가 성폭력에 연루됐다고 생각하면 불편하고 집중이 안 될 것 같다”며 “미투 운동을 유심히 지켜보며 거론되는 인물들이 출연하는 연극은 앞으로도 보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싶지만, 관객으로서 피해자들을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뿐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관객들의 공연 보이콧은 이윤택 연극연출가 등 과거 성추행 행위가 드러난 직접적 가해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성폭력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방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게도 향한다. 연희단거리패 단원이 폭로한 글에서 이 연출가의 성폭력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던 선배로 지목된 A씨가 스태프로 참여한 연극이나, 미투 운동에 참여한 배우의 피해 사실을 알고도 역시 묵인했다고 전해진 배우 B씨가 출연하는 뮤지컬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관객들의 보이콧 대상이 되고 있는 한 공연의 관계자는 “예매 취소 표가 지속적으로 나온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며 “특히 공연 마니아들이 취소하기 때문에 객석의 맨 앞자리 등이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찍 매진되는 인기작품의 경우 이런 자리가 예매 취소되더라도 바로 다른 관객이 티켓을 구입해 피해가 아직은 크지 않다고 전했다.

공연 관계자들은 국내 공연계의 큰손인 30대 여성 관객의 동향도 주시하고 있다. 공연 티켓 예매처인 인터파크에 따르면 지난해 공연 티켓 구매자 164만822명 중 여성이 72%였다. 이중 30대 여성이 34.3%로 가장 많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지속적으로 폭로된다면 보이콧 운동은 더 확산되고 오래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한국일보

트위터 계정 '공연계#ME_TOO'에 게시된 그림. 공연 관객들은 "성범죄자가 참여한 작품을 소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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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피해자들을 지지한다는 ‘위드유(#WithYouㆍ당신과 함께 하겠다) 운동’의 일환으로 25일 공연장이 밀집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집회를 연다. 지난 17일 개설된 트위터 계정 ‘공연계#ME_TOO’ 계정은 팔로워 수가 1,500명을 넘어섰다. 트위터 계정은 관객 3명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이들은 “관객으로서 성범죄자가 참여한 작품을 소비하지 않겠다. 관객은 성범죄자의 무대를 원하지 않는다”라며 집회를 계획했다. 네티즌을 상대로 집회 참가 의사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한 뒤 작성한 집회신고서에는 참가인원을 600명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공연 보이콧이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연극인 등 선의의 피해자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자칭 ‘연뮤덕(연극 뮤지컬과 마니아를 뜻하는 ‘덕후’의 합성어)’인 송모(29)씨는 “성추문 관련 연출가가 만든 작품이 무대에 오르지 못할 경우 이 작품에 같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만으로 피해를 볼 다른 관계자들이 우려된다”며 “정부지원금 재분배 등 성폭력 관련 창작자나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방법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극인들의 공동대응도 이어지고 있다. 연출가, 배우 등은 21일 밤 10시 서울 종로구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비공개 모임을 열었다. 이들은 변호사 등 법률자문가와 함께 자리해 “연극인의 연대를 기반으로 피해자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법리적인 정보를 얻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윤택 연출가를 제명 처리한 한국연극협회도 “범연극계와 상의하며 법적인 조치를 포함, 적절한 방안을 지속적으로 찾고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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