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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여행] 눈부시게 빛나는… 순백의 사라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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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라산 겨울 산행 / 초록나무도 울퉁불퉁 돌길도 흰 눈으로 수줍게 단장 / 사박사박~ ‘비밀의 숲’ 2시간 오르니 산정호수가 반겨줘

왠지 남쪽은 사시사철 푸를 것만 같다. 서울엔 한파가 몰아쳐도 남쪽은 따스한 바닷바람이 불며 초록빛의 향연이 펼쳐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따뜻할 것을 기대하고 떠났지만, 이곳도 겨울을 피하진 못한다. 실망도 잠시 반전이 벌어진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은 풍광을 만나게 된다. 이 반전이 때로는 여행의 묘미로 작용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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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라오름은 백록담처럼 정상 분화구에 물이 고여 있다. 제주 오름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산정화구호다.


이번 겨울 제주엔 참 많은 눈이 내렸다. 초록빛은 하얀빛에 덮여 설국으로 변했다. 설국으로 변신한 제주의 풍광을 느끼려면 ‘비밀의 숲’으로 가야 한다. 봄꽃 대신 눈꽃이, 잔잔한 호수 대신 꽁꽁 언 얼음이 여행객을 맞는다. 눈이 없을 땐 울퉁불퉁한 돌길이지만 눈이 내리면 평지를 걷듯 편하게 산을 오르며 오롯이 풍광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변모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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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한편에 나무데크가 있지만 호수가 얼어 있으면 대부분 호수 위를 가로질러 전망대가 있는 반대편으로 넘어간다.


제주 한라산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정상의 백록담을 떠올린다. 하지만 백록담을 꼭 오르지 않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백록담 가는 길목의 사라오름이다. 백록담 아래에 자리한 사라오름은 백록담처럼 정상 분화구에 물이 고여 있다. 제주 오름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산정화구호다. 이 산정호수가 ‘작은 백록담’이라 불리는 비밀의 장소다. 일반에 개방된 것은 2010년으로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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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오름 가는 길의 해발 1200m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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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라오름은 백록담처럼 정상 분화구에 물이 고여 있다. 제주 오름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산정화구호다.


사라오름은 높이가 1324m이지만 5·16도로를 타고 올라 해발 750m 높이에 있는 성판악휴게소부터 산행을 시작해 수월하다. 특히 겨울 사라오름 산행의 특권은 눈이 만든 평탄한 길이다. 탐방로 입구에 ‘돌길이 위험하니 구두나 슬리퍼는 착용 금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을 정도 악명 높은 돌길이지만, 겨울엔 눈이 돌길을 모두 삼켜버린다. 양옆으로 눈이 쌓여 있고, 탐방로는 흰 눈으로 곱게 다져져 있어 동계올림픽 종목인 루지, 봅슬레이 트랙을 연상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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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오름을 오르면서 가장 눈에 띄는 식물은 굴거리 나무다. 긴 잎이 있는 상록활엽수지만, 추위에 강해 해발 1200m에서도 자란다. 키 작은 굴거리 나무가 눈에 파묻혀 삐죽 고개만 내밀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눈으로 둘러싸인 길을 걸으면 주위의 풍경에 시선이 머무른다. 겨울왕국이란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다.

성판악휴게소에서 사라오름까지 길은 평탄하지만 거리는 꽤 된다. 왕복 4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작은 언덕과 완만한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다 보면 졸참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구상나무 등이 어우러진 풍광을 만난다. 가장 눈에 띄는 식물은 굴거리 나무다. 긴 잎이 있는 상록활엽수이지만, 추위에 강해 해발 1200m에서도 자란다. 키 작은 굴거리 나무가 눈에 파묻혀 삐죽 고개만 내밀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1시간 가량 걸으면 삼나무 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해발 1000m 지점에 위치한 삼나무 군락지는 다른 나무들이 펼치는 풍광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입에서 나오는 탄성을 멈출 수가 없다. 곧게 뻗은 시원한 삼나무에 눈이 쌓여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모습은 북유럽의 은빛 설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살을 에는 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산행길을 오르는 것이 축복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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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오름 산행길의 삼나무 군락지는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곧게 뻗은 삼나무에 눈이 쌓여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모습은 북유럽의 은빛 설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삼나무 군락지를 지나 속밭대피소에 이르면 3분의 2 정도를 오른 것이다. 사라오름 가는 길에 있는 유일한 화장실이다. 대피소를 지나면 이전 구간보다 약간 경사가 높아진다.

오전에 올랐다면 이곳에서 같이 온 일행들끼리 고민을 하게 된다. 사라오름만 볼 것인가, 기왕 온 김에 백록담까지 갈 것인가를 두고 얘기를 하게 된다. 사라오름보다 위에 있는 진달래대피소에 낮 12시까지 도착해야 백록담을 오를 수 있다. 그 이후에 오르면 입산을 통제해 다시 내려와야 한다. 백록담까지 오른다면 발걸음을 좀 빨리 해야 한다. 사라오름부터 백록담까지 가는 코스는 경사가 급해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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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오름 전망대에 오르면 한편으로는 서귀포쪽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육지엔 이름 모를 오름들이 곳곳에 똬리를 튼 듯 솟아 있다. 반대편으론 한라산 정상이 우뚝 솟아 있다.


시간과 체력을 고려해 무리가 갈 듯하면 맘 편히 사라오름까지만 들렀다 하산하는 것이 좋다. 그래도 황홀한 겨울 풍경을 담기엔 결코 부족함이 없다.

속밭대피소에서 한 시간가량 더 오르면 사라오름 입구를 만난다.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백록담을 가는 코스다. 사라오름 입구에서 오름 정상까지는 나무데크 손잡이를 잡고 올라야 하는 600m의 급경사다. 숨을 헐떡이며 이 길을 오르면 시야가 뻥 뚫린다. 백록담을 제외하고 한라산에서 가장 높은 산정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축구장만한 넓이의 호수를 둘러싼 나무에는 눈꽃들이 펴 있어 이곳이 설국임을 알려준다. 평온하다는 감정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다. 호수 한편에 나무데크가 있지만, 호수가 얼어 있으면 대부분 호수 위를 가로질러 전망대가 있는 반대편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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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오르면 한편으로는 서귀포쪽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육지엔 이름 모를 오름들이 곳곳에 똬리를 튼 듯 솟아 있다. 반대편으론 한라산 정상이 우뚝 솟아 있다. 다만, 날씨가 수시로 변하기에 확 트인 조망을 확보하기 힘들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기다림이다. 어느 순간 구름이 걷히면서 마주하는 풍광에 산행의 노고가 봄에 눈 녹듯 사라진다.

제주=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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