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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①] "암매장은 유언비어"…5·18 산 증인에게 물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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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방법원은 5·18 재단이 신청한 전두환회고록 출판·배포 금지 2차 가처분 사건을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 1차 가처분 사건에서는 법원이 5·18 재단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법원이 전두환 씨의 역사 왜곡을 인정하고 회고록 출판을 금지한 셈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SBS <사실은> 취재팀은 법원의 2차 가처분 사건 결정에 앞서, 과거 문헌과 증언을 바탕으로 전두환회고록의 사실 여부를 앞으로 10차례에 걸쳐 팩트체크 합니다.

"광주사태 당시에 나돌았던 유언비어 가운데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을 마구 학살해 여기저기 암매장했다는 내용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의혹은 국회 청문회에서도 제기됐고 그 뒤 5·18특별법에 따른 검찰의 조사 때에도 거론되었다. 조선대학 뒷산에 묻었다는 주장 또 암매장하기 위해 시청 청소차에 시체를 대량으로 실어 어디론가 갔다는 소문들도 있었다.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곳을 실제로 파헤쳐보기도 했지만 그런 주장들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 전두환회고록 1권 p.485

● "암매장은 유언비어다. 모두 사실 아닌 것으로 밝혀져."

전두환 씨는 자신의 회고록 1권에서 암매장은 유언비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두환회고록, "법원이 못 팔게 한 것 아니었어?" 라고 물어보는데, 맞습니다. 법원은 지난해 8월 1차 가처분 사건에서 5·18 재단의 주장을 인용해 회고록 1권에 대한 판매를 금지하라고 결정했습니다. 2, 3권은 팔아도 됩니다. 법원 결정을 어기고 1권을 판매할 경우 5·18 재단 측에 건당 5백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법원 결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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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두환 씨 측은 문제가 된 부분만 까맣게 가린 채 다시 책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회고록 '수정본'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5·18 재단 측은 하지만, 수정본에도 사실과 다른 내용이 수십 곳에 달한다며 법원에 출판·배포 금지 2차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 전두환 씨의 주장 "암매장 아니라 가매장이다."

2차 가처분 사건의 쟁점 가운데 하나가 5·18 당시 '암매장'입니다. 5·18 재단과 전두환 씨 측이 첨예하게 대립한 쟁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암매장은 유언비어일 뿐이고, 실제로 땅을 파헤쳐보기도 했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일까요?

암매장과 가매장. 국어사전에는 두 개념 모두 나옵니다. 암매장은 남몰래 시신을 파묻은 것이고, 가매장은 시체를 임시로 묻는 것입니다. 전두환 씨 측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선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사체 암매장설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라고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수사 결과는 "황룡강 주변 등 12개 암매장 가능 지역에서 관련자 11명을 조사했으나 신빙성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어서 현재로서는 발굴 불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 씨는 이걸 근거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고 그 사체를 암매장해 양민 학살을 은폐하려 한 사실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씨 측은 또 1995년 수사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계엄군이 교전 중에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즉시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현장에 가매장하고 매장된 장소에 매장지 표시를 남겨 놓았다가, 5·18 사태가 종료된 이후 이를 수습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계엄군이 사체를 암매장한 것은 사실무근이고, 암매장 주장 중에 어느 것도 사실로 확인된 것이 없었다"는 게 전두환 씨의 주장입니다. 5·18 당시 사망자는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누군가 가매장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계엄군에 의한 암매장으로 오인할 수 있었다는 취지입니다.

● 5·18 재단 "유언비어가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사실"

5·18 재단의 반박은 명료합니다. 실제로 암매장된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5·18 당시 광주시청 직원이었던 조성갑 씨입니다. 5·18 재단은 조성갑 씨가 당시 41구의 시신을 수습했다면서 그 목록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또 당시 전남대 학생과장이었던 서명원 씨 사례도 있다고 5·18 재단은 주장합니다. 실제로 서명원 씨가 1980년 5월 22일 전남대 곳곳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암매장된 고등학생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단행본에 기록돼 있기도 합니다.

故 서만오 씨의 사례도 있습니다. 5·18 재단에 따르면, 서만오 씨는 1980년 5월 22일 청각장애인 동생을 찾기 위해서 시위 차량을 타고 담양군 창평면 쪽으로 가다가 광주교도소 앞 도로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숨졌습니다. 5·18 재단의 가처분 신청서에 따르면, 서만오 씨의 가족은 10여 명의 인부를 고용해 광주교도소 근처 야산을 며칠 동안 수소문한 끝에 산과 논이 맞닿은 경사진 곳에서 암매장되어 있던 서 씨의 시신을 발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취재진은 서만오 씨의 유족을 직접 만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시도했지만, 1980년 5월 그날의 상황을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

● 5·18 역사의 산 증인, 조성갑 씨와의 대화

조성갑 씨는 1980년 당시 광주시청 사회과에서 근무했습니다. 어렵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조 씨는 '노정계'라는 곳에서 노조 업무를 담당했고, 공무원이면서도 전면에 나서 매일 저녁 시위에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본인 업무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신 수습에 나섰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모두 41구를 수습했습니다. 그 시절 사진 한 장 남아있지는 않지만, 기억은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5·18 역사의 산 증인, 77살 조성갑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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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갑 씨는, 수습한 시신 41구 가운데 매장된 시신은 광주교도소 근처가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조 씨의 말입니다. "나뭇가지를 이렇게 (시신 묻은 곳에) 한 50cm 올라오게 꽂아놓은 거예요. 그냥 저들만 알아보게 표시를 해놓은 거야." 광주교도소 근처에서 수습한 시신 8구 가운데, 이렇게 표시를 해놓은 시신은 5구였다고 했습니다. 전두환 씨의 표현대로 하면 누군가 표시를 해놓은 '가매장' 시신입니다. 가매장이라는 표현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시신 묻은 곳에 표시를 해놓은 사례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광주교도소 근처 8구 가운데 5구는 표시를 해놓았고, 나머지 3구는 표시가 돼 있지 않았다고 조성갑 씨는 증언합니다. "3구는 교도소 정문에 동산이 있었어요. 거기다가 3구를 묻어놨고. 군부에서 그 당시에 시청으로 연락을 했어요. 퇴각을 하면서 말을 흘리고 간 거죠, 시청에다. 흔적은 없지만 거기 가면 3구가 묻혀있다 해서 보니까 그거는 찾기가 쉽죠." 즉, 나머지 3구는 표시는 안 돼 있었지만 군이 알려줘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군이 매장 장소를 알려준 것이므로 이것도 사전적 의미에서 '암매장'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암매장은 유언비어", 전두환 씨의 말은 사실인가?

조성갑 씨의 증언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이 수습한 시신 41구 가운데 매장돼 있던 것은 광주교도소 근처 8구가 대부분, 그 가운데 5구는 나뭇가지로 표시가 돼 있었고, 나머지 3구는 군이 알려준 것이다. 그러면 광주교도소 근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수습한 33구 가운데 암매장된 시신이 있었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그는 광주 주남마을에서 암매장 된 시신이 분명히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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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에서 주민들이 신고를 했어요. 사람 둘이 죽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가서 그걸 산으로 내가 뒤져봤지. 막 산을 자갈밭을 뒤져보니까 찾기가 힘들어요 아주. 그때 그 수목이 막 얼마나 짙었습니까. 찾을 길이 없어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더니, 손이 하나가 손이 딱 꼬부라진 손이 하나 나와요. 다 묻히지를 못하고 그것을 발견해가지고 찾아보니까 거기다가 2구를 묻어놨더라고."

"손이 나올 정도니까 깊이 묻어지지는 않았지. 한 50cm 정도 이렇게 파고 2구를 묻어놨어. 그냥 따로 따로 2구를. 그걸 파가지고 보니까 지금 말하자면 스포츠머리고. 오리엔트 시계도 차고 그래서 그대로 유품까지 망월동에 갖다 줬어."

"거기는 표시가 안 되어 있었어. 그 근방을 샅샅이 뒤져서 찾았지. 그냥 사살한 것이 아니고 거시기 뭐여 곤봉이 깨져 있고, 그랬어. 그 근방에서 곤봉으로 아마 맞아 죽은 것 같아. 곤봉으로. 공수부대 곤봉이 크거든. 경찰들 곤봉이 아니고 특별히 더 커. 그거 한 3배는 더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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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갑 씨는 한 고등학생의 신고를 받고 야산을 뒤져 시신을 찾았습니다. 군이 시신 위치를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시신이 깊게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뭇가지 등으로 표시해놓은 것도 없었습니다. 이 시신 2구는 전두환 씨 측이 주장하는 '가매장 or 암매장' 분류법을 적용하더라도, '가매장'이 아니라 '암매장' 된 사례입니다. 시신 2구는 1980년 6월 2일 발견됐는데, 22년 만인 2002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2명 모두 20대 초반 나이였습니다.

조 씨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 41구가 모두 암매장 상태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부 시신이 암매장 상태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조 씨가 수습한 시신 가운데 일부 가매장이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전두환 씨가 본인 회고록에 암매장을 유언비어로, 사실로 밝혀진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역사를 조작하는 행위입니다. 5·18 당시 3공수여단 하사였던 정규형 씨는 1993년, 1997년, 그리고 2001년에도 언론에 본인이 광주교도소 근처에서 했던 암매장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정 씨는 당시 언론에 "밤마다 꿈속에 광주 시민 3명이 나타나 잠을 설친다"면서, 정신병원을 오가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취재진은 정 씨를 수소문했지만, 그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자료조사: 서도영)

※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학회-SNU 팩트체크 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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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②] "1980년 5월 21일 오전에 무기고 습격"…시간을 왜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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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용 기자 psy05@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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