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2004년 'D램 악몽' 재연되나… 통상마찰에 불안한 기업들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미국이 한국산 철강 제품에 대해 최대 53%의 고율 관세를 추진하는 등 통상 압력을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통상 압력이 반도체나 TV, 스마트폰, 자동차 등 다른 주력 수출 품목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세계 최대 프리미엄 시장인 미국에서 밀려날 경우 매출 감소는 물론 브랜드 이미지에도 치명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특히 기업들은 미국에 대해 WTO(세계무역기구) 제소와 한·미 FTA 위반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대해서도 "상황만 더 악화시키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고 있다. 송원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통상 문제는 국제기구에 제소해 이기더라도 이를 강제할 수단은 마땅치 않다"면서 "정부의 역할은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비즈

미국 전자제품 전문매장인 베스트바이의 삼성전자 TV 판매 코너에서 미국 고객들이 신제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 미국 정부가 한국에 대한 통상 압박을 강화하면서 기업들은 철강뿐 아니라 반도체·자동차·TV 등 다른 분야로도 압박이 확산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에 떨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TV로 통상 압력 번질까 노심초사

한국 기업들은 지난해 전체 수출의 11.9%에 해당하는 686억1000만달러(약 73조5773억원)를 미국에 수출했다. 중국(1421억2000만달러)에 이어 둘째 규모이다. 하지만 중국 수출품은 중국에 나가 있는 한국 현지 공장으로 가는 부품과 반(半)제품 위주인 반면 미국 수출은 첨단 IT(정보 기술) 기기 등 완제품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미국 시장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상징성이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은 전세계 최고 제품들이 모여 격전을 벌이는 시장"이라며 "미국 시장에서 인정받는 것은 최고 품질의 제품으로 공인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매출의 30% 이상을 미국에서 올리는 삼성전자는 매년 25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판매·관리 비용을 쏟아부으며 점유율 유지에 힘쓰고 있다.

조선비즈



하지만 미국 정부의 규제는 이런 노력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2004년 D램 반도체 담합 사건이다. 당시 미국 법무부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독일 인피니온, 미국 마이크론 등 D램 업체들이 담합해 가격을 끌어 올렸다며 임직원들을 구속하고 1조원에 가까운 벌금을 부과했다. 당시 40%대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타깃이었다는 분석이 많았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는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급등하면서 시장을 독과점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극소수 업체가 50%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올리고 있다"면서 "미국 정부가 반독점 조사나 수입 규제에 나설 명분이 충분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미 세이프가드가 발동된 세탁기 이외의 다른 생활 가전, TV·스마트폰 등으로 통상 압력이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TV와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상당수 생활 가전 품목에서 미국 시장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한국 TV에 덤핑 문제가 있다고 말한 것이 어떤 형태로든 조치를 하겠다는 예고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정부는 통상 압력 이외에도 기업을 압박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이 있다. 2016년 출시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노트7은 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가 배터리 결함을 공식 발표하고 리콜을 결정하면서 단종 절차를 밟았다. 당시 삼성전자는 4조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

전문가들 "강경 대응보다는 대화와 설득 필요"

기업들은 WTO 제소와 한·미 FTA 위반 여부 등을 검토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자칫 한·미 간 정면충돌로 이어지면 기업들만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 세이프가드나 철강 관세 문제에서 정부 역할이 거의 없었다"면서 "정부가 강력하게 대응한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지나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미국에 한국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WTO에 제소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최소 2~3년이 걸리기 때문에 당장은 해법이 될 수 없다"면서 "제소를 검토할수는 있겠지만, 미국과 고위급 대화 창구를 마련해 협상에 나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defying@chosun.com);강동철 기자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