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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위계로 길들이기·문화 권력집단 비호가 키운 ‘연극계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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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1인 제왕적 지배 용인 ‘뿌리깊은 폐단’ 구조적 문제

정신·몸·시간 일상 억압 ‘폭로하면 왕따’ 침묵의 카르텔로 방관

대안 찾기 힘든 열악한 창작 환경도 원인…“공론화로 개선해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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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신처럼 떠받들어지며 군림하는 연출가” “무서운 독재자” “왕 같은 교주 같은 존재”….

연희단거리패를 이끈 연극연출가 이윤택씨(66)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들이 표현한 그의 모습이다. 경남 김해에 소재한 극단 ‘번작이’의 대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이도 “연출가이자 대표인 그는 그곳에서 연극으로 왕이었(다)”고 했다.

연극계 ‘미투(#Me_too, 나도 당했다)’ 운동은 ‘이윤택 사태’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정신적·물리적 폭력을 당하고도 드러낼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특정인뿐 아니라 연극계 구조 자체를 ‘가해자’로 호명한다. 이씨의 상습적인 성폭력이 본인 기억에 따라서도 “18년 동안” 은밀히 일어날 수 있었던 데는 그간 쌓여온 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미투’가 연극인들 전반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공감을 얻는 것도 이 같은 문제의식 때문이다.

논의는 ‘무엇이 괴물을 키웠나’라는 질문으로 진화하고 있다. 연극계 관계자들은 연출가 1인에게 ‘제왕적 지배’를 허용하는 시스템을 근본 원인으로 지목했다.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최근 불거진 문제는 연극계, 더 나아가 예술계 전반에 만연한 문제”라며 “이번에 구조적 문제가 다 드러나야 하고, 그 본질은 뿌리 깊은 위계폭력”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위계폭력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젠더 위계, ‘대안’을 찾기 어려운 열악한 창작환경 등과 결합해 사태를 키웠다는 것이다.

위계폭력은 하루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근·현대연극사를 관통하는 연극계의 대표세력, 이른바 ‘거장’으로 불리는 이들부터 시작해 수십년 동안 쌓인 폐단이라고 연극계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폭력적 권력관계의 공간도 전방위적이다. 연극계 관계자들과 ‘미투’ 증언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일단 대학 연극 관련 학과에서부터 사제 간의 위계폭력을 경험한다. 일부 대학에서는 일명 ‘빠따(방망이 구타) 문화’라는 물리적 폭력도 존재해왔다. 극단에 들어가서도 사제나 선후배 관계로 엮이면서 위계 구조가 연장되는 현실이다. 극단에 입문하는 것은 곧 ‘○○○ 선생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극단 ‘고래’ 대표인 이해성 연출가는 “연출의 권한을 절대화하는 구조에서 노예적 인식을 갖게 된다”며 “신입단원을 모집한 뒤 ‘연출은 왕’이라는 인식과 스스로 내면화한 노예적 태도를 바꾸는 데 1년쯤 걸린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연희단거리패처럼 합숙생활을 하는 경우엔 이런 구조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연습과 공연뿐 아니라 부적절한 안마 등 ‘선생님 수발’이 주된 노동이었다고 피해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연출가=선생님=왕=가부장적 아버지’라는 공식이 일상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2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된 또 다른 피해자의 글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울 정릉에 방 3개짜리 빌라는) 선생님이 윤택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서울생활 시중을 드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엔 룰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을 위하여 새벽 6시에 일어나 사과를 깎아드려야 합니다. (중략) 19살, 20살의 어린 동기 두 명이 서울 숙소에 합류했습니다. 안마를 하기 위해서.”

김재엽 연출가는 “제왕적 연출가가 정신뿐 아니라 몸과 시간까지 지배했다”며 “집단 속에서 통제받고 감시받는 단원들은 ‘여길 벗어나면 연극을 할 수 없다’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연출가의 요구를 거절한 뒤 배역이 줄어들고 ‘어디서도 배우로 서지 못할 것’이라는 유·무형의 협박을 경험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는 조직적 용인과 은폐로 이어진다. 이씨의 오랫동안 지속돼온 성폭력에도 많은 단원들이 외부로 이를 알리지 못하고 ‘침묵의 카르텔’을 쌓아간 데도 이 같은 심리적 부담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투’ 운동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고 고백한다. 수십년간 방치된 잘못된 구조의 문제를 개인이 짊어지고 가는 모습들이다.

구조적 폐단이 특정인의 행위에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단죄와 함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재엽 연출가는 “한국 연극사에서 주류 권력을 구축해온 세력, 문화계 엘리트 집단의 비호를 받아온 세력이 존재한다”며 “이번 미투 운동으로 그들의 치부까지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해성 연출가는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안정을 찾게 하는 일”이라면서도 “이번 사태를 통해 뿌리 깊은 문제를 공론화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블랙타파)는 2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법률 조력 방법 등을 논의하는 회의를 열 예정이다. 최초 폭로자인 극단 ‘미인’ 김수희 대표와 성폭행 피해자는 이씨를 고소키로 한 상태다.

추가 가해자를 드러내는 ‘미투’ 운동은 계속 진행 중이다. 뮤지컬 음악감독 변희석씨는 전날 성희롱 발언이 알려지면서 공개 사과했다. 오랫동안 서울예대 교수로 재직해온 원로 연극연출가의 성추행 의혹도 제기됐다. 그는 술자리에서 제자나 여성 배우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한 의혹을 받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날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태와 관련해 분야별 신고·상담 지원센터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는 3월부터 성폭력 관련 신고를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예술인복지재단 내 신고·상담센터, 콘텐츠진흥원 공정상생센터를 통해 할 수 있게 된다. 문체부는 문화예술·영화·출판·대중문화산업 및 체육 등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고, 분야별 특성을 반영한 성희롱·성추행 예방·대응 지침도 마련할 계획이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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