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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슈+] 성희롱·폭언 시청하며 'ㅋㅋ', 청소년 놀이가 된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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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미디어 성희롱·폭언 난무… 남녀로 나뉘어 서로 헐뜯어 / 친구 외모 등 비하하며 놀아… 성평등 강사에게 협박메일도 / 여가부, 양성평등 공교육 강화… 성차별 표현 가이드라인 마련

세계일보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A군은 우울할 때마다 유튜브나 아프리카TV의 방송을 시청한다. BJ(1인 방송인)가 시청자들의 댓글을 확인하며 욕을 퍼부어대거나 진행자 두 명이 욕설을 주고받는 방송들이다. A군은 이들의 욕을 듣고 있으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욕과 관련한 신조어를 배워 친구들과 주고받기도 했다. 말 끝에 붙였던 “씨X”이라는 추임새를 기분이 좀 더 나쁠 때는 “엠창”(‘니 에미 X녀’라는 뜻의 인터넷 비속어)으로 바꿔 넣기도 했다.

특정 집단을 겨냥해 인터넷상에서 집단 공격을 할 때면 피가 들끓는 분노와 함께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A군은 지난해 여성 게이머이자 BJ인 ‘갓건배’를 죽이겠다며 집을 찾아나선 한 인기 남성 BJ의 방송을 지켜봤다. 갓건배는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폭언을 성별을 바꿔 들려주는 ‘미러링’(거울반사)을 방송 소재로 삼은 1인 방송인이다. 남성 비하 발언을 일삼으며 유튜브에서 계정 영구정지 처분을 받았다. A군은 “친구들과 갓건배 방송에 몰려가 욕 대결을 했다”며 “몰입하다 보면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일반 게임보다 재미있을 때가 많다”고 했다.

세계일보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고 각종 혐오 용어가 유행하면서 ‘여성혐오’나 ‘남성혐오’를 놀이로 생각하는 청소년이 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남녀 대결을 벌일 뿐만 아니라 같은 반 학생의 외모나 몸무게, 신체 접촉 가능성 등을 언급하고 서로 킥킥거리며 즐기는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여성가족부는 20일 공교육의 성평등 교육을 강화하고 1인 미디어의 성차별적 표현과 혐오적 표현을 막기 위한 자율규제 가이드라인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여가부의 민관 합동 ‘성평등 문화 확산 태스크포스’는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터져 나온 성희롱과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뿌리 깊은 성차별적 사회인식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교육과 미디어의 순기능 회복이 절실한 과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성인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의 혐오 발언은 위험 수준이다. ‘이 정도 하면 벌 받을까? 안 받겠지?’라며 사회적 규범과 윤리적 한계를 시험하려는 10대의 저항문화가 인터넷에서 왜곡돼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10대 아이들은 원래 욕을 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포르노그래피(외설문화)에 기반한 욕설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며 비하·조롱하는 표현이 심해지고 있다”며 “여성혐오 발언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즐기려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꺼리고 싫어하는 게 아니라 대상을 상품처럼 여기고 언제든지 무너뜨리거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게 혐오다. 남성의 물리적 위협 언급이 더 많다는 점에서 남성혐오보다 여성혐오 종류와 수준이 더 심각하다. 고등학교에서 성평등 강의를 진행하는 이모씨는 “남학생들로부터 여자 편들지 말라는 협박 메일을 자주 받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혐오 문화는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되는 사회문제”라며 “초등학교 때부터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을 높이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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