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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맏형'은 존중받고 '맏언니'는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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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팀추월 '맏언니' 노선영을 둘러싼 창피한 '올림픽 정신' 훼손…메달보다 중요한 가치 잃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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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에서 레이스를 마친 노선영. /강릉=김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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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또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팀은 해체됐다. 대열을 이탈한 ‘미운오리새끼’는 그렇게 고개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홀로 남아 눈물만 훔친 이를 다독인 건 외국인 코치뿐이었다. 경기는 망가졌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무너졌다.

19일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에 나선 노선영(29)-김보름(25)-박지우(20) 선수 얘기다. 올림픽 출전 이전부터 이들에게 ‘영혼 없는 팀플레이’ 논란이 없었던 건 아니다.

김보름은 한국체육대 빙상장에서, 노선영은 태릉선수촌에서 각각 따로 훈련했다. ‘팀추월’은 종목명처럼 팀의 단합이 중요한 경기지만, 이들은 훈련 내내 눈빛도 대화도 한번 교환하지 않았다.

‘억지로 뭉친’ 팀이라도 경기는 ‘팀플레이’로 시작해 ‘팀플레이’로 끝내야 한다. 하지만 이날 경기는 수억 명의 시청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산산조각난 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맏언니가 초반 레이스에서 동생들을 이끌고 치고 나가다 힘에 부쳐 뒤처질 때, 동생들은 맏언니의 손을 잡지 않았다. 막내가 선두일 때 뒤에서 밀어주던 맏언니의 희생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막판 레이스에서 펼쳐진 것이다.

김보름-박지우 두 동생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도 단합의 부재에 따른 자책보다 아쉬운 기록을 들먹이며 ‘뒤처진 맏언니’를 향한 책임 전가에 힘을 쏟는 듯한 발언에 무게를 실었다.

“중간에 잘 타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뒤에 격차가 벌어지면서 기록이 아쉽게 나왔다. 선두(김보름-박지우)의 랩타임은 계속 14초대였다.”(김보름) “사실 선영이 언니가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걸 저희가, 근데 기록 욕심도 있다 보니까…”(박지우)

인터뷰에 노선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팀 불화에 속상했을 수도, 뒤처진 자신에 대한 책망이 서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팀추월’은 상대 팀을 추월하는 게 목적인 경기인데, 이날 한국 대표팀은 자신의 팀원을 추월하는 이상한 구도를 만들었다. 출전한 어느 국가도 하지 않는 경기 모습을 올림픽 주최국의 대표팀이 구현함으로써 평창 동계올림픽의 ‘가장 창피한 장면’을 연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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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에서 노선영이 4초 가량 뒤처지고 있다. /강릉=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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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탈락한 여자 대표팀에 앞서 출전한 남자 팀추월 대표팀은 한국식 가족주의 유대를 앞세워 강력한 우승후보 네덜란드를 제치고 예선 1위로 통과했다. 맏형 이승훈(30)은 조카뻘 되는 두 동생 김민석(19)-정재원(17)과 당기고 밀어주는 협동심으로 감동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무엇보다 세 ‘형제’의 단합이 보여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겸손을 무기로 한 두 동생이 무한 신뢰로 맏형을 더 ‘멋있게’ 치장했다는 것이다.

맏형은 멋있게 빛났지만, 맏언니는 초라하게 추락했다. 맏언니를 향한 신뢰는커녕 기록에 대한 이기심이 커지면서 여자 대표팀은 메달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잃었다.

노선영은 골육종으로 2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쇼트트랙 국가대표인 동생 노진규의 누나다. 2014년 소치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려던 계획을 접은 것도 동생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기량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올림픽 정신은 누구보다 강했던 누나는 스피드스케이팅 1500m 결승에서 14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도 “마지막 올림픽이니까 남은 경기는 후회 없이 하고 싶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국가대표는 그 자격이 주어진 순간부터 모두가 하나다. 그중 의외의 실력을 보여 메달을 따는 선수도 있고, 기대와 달리 주저앉는 선수도 있다. 최민정의 500m 실격도, 이상화의 은메달도, 윤성빈의 금메달도 모두 우리에겐 소중하다.

그 평등의 가치에서 우리는 이웃을 돌아보고, 다른 이의 숨겨진 마음을 읽는다. 여자 팀추월에서 우리가 보고 싶었던 건 메달을 향한 이기심이 아닌 함께 뛰는 ‘가족’의 단합이었다. 맏언니의 슬픔을 다독일 올림픽 정신이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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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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