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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ESC] 대통령님, 한국식 나이 셈법 없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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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들어가

위트 넘치는 청원 찾아보니

중국집 고춧가루 포장부터 로또복권까지

아이돌 팬클럽 격전장이 되기도 해

모델은 미국 백악관 ‘위 더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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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누리집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과 미국 백악관 청원 게시판 ’위 더 피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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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누리집의 ‘국민청원 및 제안’(이하 국민청원) 게시판은 정부와 국민이 직접 소통하는 창구인 한편, 동시대 사람들이 정치, 사회, 경제 이슈를 공유하고 문제점을 환기하는 광장의 역할을 겸한다. 온갖 사람들이 올리다 보니 비상식적이거나 장난스러운 내용도 등장한다. 게시판의 목적에 어긋나는 청원들이 정작 중요한 사안을 가린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다 같이 엄중하고 진지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가볍게 웃고 넘겨도 좋을 만한 다소 황당하고 사소한, 동시에 위트 넘치는 청원들로 눈을 돌려봤다. 설 연휴, 명절 음식을 먹으면서 한바탕 웃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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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양념도 청와대 국민청원에 오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하다 보면 국민청원을 함께 하자는 글을 하루에도 여러 건 본다. 그중 나와 내 이웃의 관심사가 맞닿은 건을 골라 동참한다. 청와대 게시판을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종종 황당한 청원을 발견할 때가 있다.

‘중국집 고춧가루도 포장해주세요.’ 지난 1월4일에 올라온 이 청원은 짜장면에 뿌려 먹는 고춧가루가 농산물인 것이 고려됐는지 ‘농산어촌’ 분류에 등록됐다. 음식배달 앱의 게시판 글 같은 내용에 웃음이 터지니, 게시판 우측 상단에 떡하니 자리잡은 대한민국 청와대 아이콘이 중화요릿집처럼 보이기도 한다.(실제 ‘청와대’를 상호로 쓰는 중국집이 전국에 10곳이 있다.) 로또 복권을 6년째 같은 번호로 구매해도 4~5등도 당첨이 안 된다고 따지는 청원도 있다. 이 청원은 카테고리가 ‘미래’다. 로또가 미래를 보장하는 상징 같은 것일까. 웃음이 난다. 대체 무슨 소린가 싶은 괴이한 청원도 빼놓을 수 없다. 전 지구인 대상으로 한글을 무료로 교육하자는 청원은 지구 표준어로 한글을 밀고 있었다. 영화 <컨택트>의 외계인이 가나다라를 배워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가 하면 지난 1월11일 올라온 청원 중엔 ‘한국식 나이 폐지해주세요’도 있다. 떡국을 먹을 때마다 나이 드는 게 서러운, 영원한 젊음의 아이콘 ‘피터 팬’ 같은 이가 올렸나 봤더니 내용은 사뭇 진지하다. 21개월 쌍둥이를 둔 청원자는 전업주부로 한국식 나이는 42살, 만 나이로는 40살이라고 한다. 그는 “한국식 나이는 국제화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왜 태어나자마자 1살로 하는지” 묻는다. 7개월 만에 태어난 자신의 자녀들은 좀 억울하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한국식 나이 셈법과 관련한 청원은 100건이 넘었다. ‘한국식 나이 셈법은 나이지상주의라는 꼰대문화를 야기’한다는 주장 등이다.

청와대 문장의 봉황은 모두 수컷이라며 음양의 조화가 깨졌으니 바꿔야 한다는 청원도 있다. 동의한 수는 ‘0’이다. 이처럼 황당한 청원들에 동의한 ‘숫자’는 미미하다.

게시판이 아이돌 팬클럽의 격전장이 되기도 한다. 방탄소년단(BTS)의 팬클럽 ‘아미’(ARMY)와 엑소(EXO) 팬클럽인 ‘엑소엘’(EXO-L)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상대방 팬덤을 비난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다퉜고, 이들은 ‘2017 엠넷 아시안뮤직어워즈(MAMA)’와 골든디스크상 등의 시상 결과가 불공정하다며 폐지를 청원했다. 걸그룹 아이오아이(IOI)의 재결성을 요청하고, 포항 지진으로 수능이 연기됐으니 레드벨벳의 컴백도 1주일 연기하라는 청원도 있다. 레드벨벳의 노래가 중독성이 강해서 수험생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다. 아이돌 그룹과 관련된 청원 중에는 외국 케이팝 팬들이 작성한 게시물들도 보인다.

■미국 국민청원 게시판도 가보니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제안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로 만들어진 국민청원 게시판의 모델은 미국 백악관의 온라인 청원 코너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이다. 버락 오바마 전임 행정부의 ‘열린 정부’ 구상에 따라 2011년 9월 문을 연 ‘위 더 피플’은 이름과 이메일로 가입하면 미국인이 아니어도 참여가 가능하다.

지난해 10월에는 자유한국당이 한국 전술핵 재배치 청원을 올렸고 3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청원이 올라갔으나, 각각 630여명과 1만여명의 서명을 얻어 백악관 답변 기준인 10만건에 미치지 못해 폐기됐다.

‘위 더 피플’의 오픈 초기, 백악관은 미 정부가 외계인과 접촉한 내용을 공개하라는 청원에도 답을 해야 했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국(OSTP)은 블로그를 통해 아직 외계인과 접촉하지 못했다며 김빠지는 답변을 내놓았지만, 대통령과 외계인의 관계는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이야깃거리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 대통령이 외계인과 세 차례 면담을 했다는 설이 있고, 지미 카터가 주지사 시절 미확인비행물체(UFO)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힐러리 클린턴도 대통령이 된다면 유에프오와 외계인에 관한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를 공개할 것을 공약한 바 있다.

미국인다운 황당 청원은 또 있다. 2013년 11월14일에 등록된 ‘데스스타’ 청원은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행성 파괴 무기인 데스스타를 건설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스타워즈> 세계관의 유머를 곁들여 이를 거부한 백악관 행정관리예산국(OMB)은 데스스타 건설에는 85경달러 이상이 소요되며, 행정부는 행성을 파괴할 계획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미국인의 국민간식으로 불리는 ‘트윙키’(Twinkie)도 2011년 11월 청원 코너에 올랐다. 제조사가 파산 위기에 처해 생산이 불투명해졌으니 트윙키 산업을 국유화하고, 과자의 가운데 달콤한 크림이 없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이다. 한국식으로 바꾸면 초코파이 중심부의 쫀득한 마시멜로 크림을 보호해달라는 것과 같다.

이 밖에도 맥주 애호가였던 오바마가 만드는 백악관 맥주 제조법 공개나, 반미감정이 담긴 노래를 불렀던 가수 싸이의 백악관 크리스마스 콘서트 출연을 취소하라는 청원도 있었다. 청원이 늘다 보니 관련 기사도 등장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2012년 12월9일 지면에 외계인 청원 등에 답변을 하느라 낭비되는 정부의 시간과 세금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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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의 ‘위 더 피플’과 6개월에 접어드는 국민청원을 단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뜨거운 국민청원 게시판을 두고 소수의 황당한 청원에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2심 공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판사의 특별감사를 요청하는 청원이 사흘 만에 20만명을 돌파할 정도다. 아이돌 팬클럽의 청원이 좀 거슬린다고, 장난스러운 청원 글이 있다고 지금의 열기가 식을 것 같지도 않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국민청원

청원(請願)이란, 국민이 법에 따라 손해의 구제, 법률·명령·규칙의 개정 및 개폐, 공무원 파면 따위를 청구하는 일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26조에 국민의 청원권이 명시돼 있다. 서양에서는 전제군주 시대에 국민 구제 방법으로 청원제도가 처음 등장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나라에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엔 조선 태종 때부터 실시한 신문고(申聞鼓) 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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