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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 사회] 노벨상과 공범들 /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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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연령에 비하여 말하면 어디로 보든지 17, 8 내지 20 전후의 여자가 아니라 30 내외의 중년의 여자라 하는 것이 가(可)하고 피부에 비하여 말하면 남자를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하는 기름기 있고 윤택하고 보드랍고 푹신푹신한 피부라고 하느니보다도 오히려 육욕에 겉으론 윤택하지 못한, 지방질은 거의 다 말라 없어진 피폐하고 황량한 피부가 겨우 화장분의 마술에 가리워서 나머지 생명을 북돋워가는 그러한 피부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거친 피부를 가리어주고 있는 한 겹의 얇은 분을 벗겨버리면 그 아래에는 주름살 진 열(熱)없는 살가죽이 드러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詩)도 한 겹의 가냘픈 화장이 있다.”

김기진이 1924년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이라는 제목으로 <신여성>을 통해 김명순의 시를 비판한 글이다. 김명순의 시를 화장한 늙은 여자에 비유한 이 글은 늙은 여자, 그래 봐야 30세 내외의 여자에 대한 비하와 경멸의 시선으로 가득하다. 여성의 젊음과 늙음을 순수와 추함으로 빗대는 문학인의 버르장머리는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다. 더불어 여자에게 ‘남자를 많이 알지 못하는’ 상태는 순수의 세계다. 남성 예술가가 여성에게 지분거리는 추태와 폭력은 예술가의 기행이 되지만, ‘남자를 아는’ 여성의 ‘육욕’은 추하다. 그렇기에 연애하는 여성이 성폭력 범죄자보다 더 ‘더러운’ 평판을 받아왔다.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범죄 피해를 겪은 이들의 목소리가 꾸준히 쏟아지고 있다. 원로 시인의 성추행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두고 한쪽에서는 “정치적, 도덕적인 올바름이 지배하는 멸균 공간”을 낳을까 봐 우려한다.(<중앙일보> 2월9일자) 아마 성추행을 유산균 정도로 생각하나 보다. 몸에 필요한 균처럼 술과 여자를 남성의 창작에 필요한 유산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폭로를 통해서 겨우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만큼 제도가 엉망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미 사회의 몸체가 감염으로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멸균’을 걱정한다.

‘한국 문학의 상징’을 걱정하며 마치 맡겨둔 노벨상을 돌려받지 못하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워하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이 사회에 성범죄가 어떻게 안전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우상을 지키느라 사회의 통증을 외면하는 문학의 언어야말로 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성적 착취를 예술이라는 방어막 안에서 쌓아온 이 폐단의 악취를 맡지 못한다면 이미 함께 썩었다는 뜻이다. 성범죄를 격려하고 가해자를 위로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착취의 구조를 세우고 있는 기둥이다.

<연애담>으로 호평받았던 이현주 감독은 성폭력 유죄 판결로 수상 취소와 함께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제명되었다. 이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현주 감독과 동일한 처벌을 남성 창작자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성의 경우 창작자의 윤리와 작품의 성취가 분리되지 않는다. 반면 갖은 추태에도 ‘그래도 능력은 있다’며 악착같이 살아남는 행운은 오직 남성에게만 주어진다. 이렇게 다르게 적용되는 정의의 실체에 대해서는 분명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화 투쟁을 다룬 영화 <1987>의 영어제목은 ‘1987: When the Day Comes’다. 그날이 오면. 심훈의 시에서 비롯된 이 ‘그날이 오면’은 꾸준히 역사적 진보에 대한 염원을 담은 표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랫동안 쌓이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폐단을 그날이 와도 치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날은 과연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그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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