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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우병우도 양승태도 거부하면 그만인 ‘대법원 셀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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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희철의 법조외전⑭ 대법원의 세번째 ‘셀프조사’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 작성 ‘각계 동향’ 문건 통해

박근혜 청와대-양승태 대법원 ‘커넥션’ 의혹 드러나

원세훈 ‘선거법’ 재판 지렛대로 상고법원 관철 궁리

법조계 “범죄혐의” 지적·시민단체 고발장 접수돼도

대법원은 수사 배제한 채 세 번째 ‘셀프조사’ 고수

관련자 강제조사 불가능한데 커넥션 전모 밝혀질까



누군가는 ‘천기누설’이라고 했다. 지난 22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공개한 법원행정처 작성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동향)이라는 문건을 두고 나온 말이다.

추가조사위는 그날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에서 찾아낸 ‘문제적 파일’을 모두 8개 공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이 문건이다. 나머지 7개는 법원 내부, 즉 법관 동향 사찰과 관련된 것이었다.

법조계에서 논란의 여지 없이 가장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이 문건이었다. 기자가 통화한 법조인들은 “이미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던 일을 사실로 확인해준 것”(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이라든가, “너무나 충격적”(법관 출신 변호사)이라는 반응을 내놨는데,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의 ‘검은 커넥션’을 의심하고도 남을 만한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천기누설’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퇴임식에서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뤄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한겨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직원들에게 인사하며 차에 오르고 있다. 그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추가조사를 끝내 거부했지만, 후임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뒤 이뤄진 추가조사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에 대한 동향 문건과 법관 사찰 정황 문건 등이 일부 드러나면서 검찰에 고발당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그는 현재 스페인 여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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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건에는 특정 사건 재판과 관련해 청와대와 대법원이 어떤 식으로든, 점잖게 말해서 ‘협조’를 하고 있다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아예 협조가 될 수 없는 사안이라면 청와대가 대법원에 대고 ‘기대’와 ‘희망’을 ‘전달’할 필요가 없고, 대법원도 특정 사건의 ‘신속 처리 추진’ 방침 같은 걸 ‘면밀히 검토’할 이유가 없지 않겠냐. 한마디로 양쪽이 재판을 가지고 저 정도 얘기는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전제가 있으니 저런 문건이 작성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

문제의 문건이 작성된 전후 맥락을 따져 보면, 청와대와 대법원의 커넥션은 단순한 의혹일 수가 없다. 문건이 작성된 2015년 2월9일은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 재판(형사 6부·재판장 김상환)에서 징역 3년형과 공직선거법 유죄를 선고받은 바로 다음 날이다. 문건에도 적혀 있듯 “선고 전 항소기각을 기대”(‘동향’ 문건)으로 1심 판결이 유지되길 바랐던 청와대는 항소심 판결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집행유예가 실형으로 바뀌어서가 아니다. 1심(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이범균)에서 무죄가 났던 ‘댓글공작=선거법 위반’ 등식이 2심에서 인정됐기 때문이다.

이 판결을 대하는 청와대의 분위기는 ‘동향’ 문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BH·청와대) 판결 선고후 동향 / 전반적 분위기 → 크게 당황하며 앞으로 전개될 정국 상황에 관하여 불안해하는 상황. 특히 우병우 민정수석 → 사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향후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

청와대가 ‘크게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동시에 ‘사법부에 큰 불만을 표시’한 이유는 선거법 위반 혐의가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될 것을 염려해서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법원에 노골적으로 협조를 요구하고 있다. 상고심을 서둘러 진행하고,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어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전합)로 사건을 가져가 달라고 했다. 당시 대법원은 스스로 그렇게 강조해온 ‘사법권의 독립’을 해칠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거리낌 없이 청취하고 있다.

이어 문건은 대법원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방향까지 제시한다.

“항소심 판결과 1심 판결을 면밀히 검토 → 신속처리 추진(굵은 글씨로 강조). 기록 접수 전이라도 특히 ‘법률상 오류 여부’ 면밀히 검토 → ‘공직선거법 제270조의 재판 기간에 관한 강행규정〔3개월〕’ 최대한 준수하여 신속 처리.”

놀랍게도, 그 이후 대법원 재판(상고심)은 이 문건이 마치 시나리오라도 되는 양 딱딱 맞아 돌아갔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우병우 민정수석의 ‘희망’이 대부분 실현됐다는 점이다.

사건은 처음에 민일영 대법관을 주심으로 하는 소부(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대법원의 최소 단위 재판부·당시 참여 대법관 박보영·김신·권순일)에 배당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법원장 이하 대법관 13명이 전부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전합)에 회부됐다. 당시 전합 구성원은 재판장 양승태(대법원장) 이하 민일영(주심), 이인복, 이상훈, 김용덕, 박보영, 고영한(이상 현재는 퇴직), 김창석, 김신, 김소영, 조희대, 권순일, 박상옥 대법관이었다.

대법원 전합은 같은 해 7월16일, 2심 판결을 파기했다. 항소심 판결 이후 157일 만이니 ‘동향’ 문건에서 검토한 ‘3개월’은 맞추지 못했지만, 통례보다 신속하게 처리한 것이다. 사건의 “결론”도 청와대의 요구와 같이 “재고”되었다. 항소심 판결 중 선거법 위반 부분을 사실상 무죄 취지로 깨버린 것이다. 전합은, ‘동향’ 문건에서 검토한 것처럼 ‘증거법 위반’, 즉 검찰이 재판에 증거로 제출한 국정원장 지시 문건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아 원 전 원장에게 사실상 면벌부-흔히들 말하는 ‘면죄부’는 ‘면벌부’의 오역이라고 한다-를 내주었다. 박근혜 청와대의 ‘앓던 이’를 절반 이상 빼준 셈이기도 했다.

한겨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해 11월28일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사에 들어서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제18대 대선 과정에서 댓글 공작을 한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에서 유죄를 받게 되면 민주적 정당성을 잃게 될 것으로 보고, 이를 막기 위해 대법원에 협조를 구한 사실이 최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사진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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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정원 댓글 사건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 이후 탄핵으로 무너져 내릴 때까지 줄곧 아킬레스건이었다. 선거법 유죄가 확정되면 박근혜는 ‘불법 댓글로 당선된 대통령’으로 낙인 찍히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청와대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은 집권하자마자 검찰 수사 단계부터 갖은 방법과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선거법 적용만은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 내밀한 사정은 지난해 12월24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채동욱 전 검찰총장 인터뷰에 드러나 있다. 2013년 4월4일 취임한 채 전 총장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사건인 줄 짐작도 못 한 채 댓글 수사에 발을 담갔다.

-5월 중순 댓글 수사팀 첫 보고 구성 한 달 무렵 수사팀의 첫 보고를 받았다. 김용판의 공직선거법 위반 적용과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이었다. (…) “좋다, 그렇게 법무부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황교안(당시 법무부장관) 전화 황 장관이 연락해 “나는 견해가 다르다”고 했다. “선거법 위반 적용은 어렵고 구속도 말이 안 된다”는 얘기였다.

-5월27일 선거법 위반 구속기소 결론 (…) 수사팀이 만장일치를 봤다. 원세훈과 김용판 모두 선거법 위반에 구속 기소! 이날은 원세훈 2차 소환일이었다.

-다음 날 황교안 전화 “불가” 수사 결론을 법무부에 보고했다. 보고받은 황 장관이 전화했다. 선거법 위반 적용은 말이 안 되고 구속은 더더욱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평생 공안 분야만 했고 선거법 전문가여서 자신이 잘 안다고 했다. (…) “이미 검찰이 결론 내린 선거법 위반 적용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고, 흑백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 선을 지켜내는 게 총장의 역할이다. 그러니 신병 구속은 양보하자.” 수사팀 회의를 소집해 다시 설명했다. 최종보고서(선거법 위반·불구속)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6월초 법무부의 침묵 공소장 작성 등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기다렸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법무부로부터 답이 없었다. 공소시효가 1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 보고하자마자 ‘오케이’가 나도 시간이 부족한 시점이었다. ‘이 정권이 선거법 위반을 아주 중요한 아킬레스건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그 침묵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6월7일 순진했다 법무부로부터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하라’는 연락이 왔다. 모두 ‘만세’를 불렀다. 총장 옷 벗고 난리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파국은 막은 셈이었다. 불구속 기소 처리 전략이 위(청와대)에 먹혔나 보나 생각했다. 나는 참 순진했다.

그 ‘순진한’ 총장은 결국 ‘혼외자 스캔들’에 휩쓸려 옷을 벗었다. 9월6일 <조선일보> 1면에 보도가 나가고 일주일만이었다. 댓글 수사팀장이던 윤석열 검사는 2014년 1월 인사에서 대구고검으로 ‘날아갔다.’ 지방 고검을 전전하는 유형이 시작된 것이다. 댓글이라는 ‘역린’을 건드린 대가는 가혹했다.

선거법 위반만은 피해가려고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쳐 1심에서 무죄를 받았는데, 2심 재판부가 이를 다시 뒤집어놨으니 청와대가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게 움직였을지는 불문가지다.

이렇게 보면, 대법원이 마치 ‘을’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청와대의 위세에 눌려 뭔가 열심히 들어주고 웬만하면 맞춰주려 무진 애를 쓰는 약자의 처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당시 대법원은 힘없는 을이 아니었다.

‘동향’ 문건 말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 향후 정무적 대응 방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 필요

● 계속하여 수세적 입장을 취하는 방안 vs 수세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국면 전환을 꾀하는 방향

-상고심 판단이 남아있고 BH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면 → 발상을 전환하면 이제 대법원이 이니셔티브를 쥘 수도 있음.

-상고심 처리를 앞두고 있는 기간 동안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을 모색하는 방안 검토 가능 → 다만, 역풍 가능성이 극히 우려되므로 모든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음.”

청와대의 ‘약점’인 원 전 원장 사건 상고심을 ‘지렛대’ 삼아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의 숙원이던 상고법원 설치를 관철해 보자는 얘기다. 그런 제안을 이 문건에선 “상고심 처리를 앞두고 있는 기간 동안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특정 사건의 재판을 대법원장의 숙원 해결을 위한 도구로 쓸 수도 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법관들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헌법 제103조)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국민이 발등을 제대로 찍힌 것일까.

이 문건은 누구에게 보고하려고 작성한 것일까. 추가조사위는 이 문건을 법원행정처 기획제1심의관이 사용한 컴퓨터에서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건 어떤 의미로 봐야 할까.

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의 얘기다. “법조를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물어봅디다. 판사들은 재판만 하는 줄 알았더니 저런 걸 다 작성하느냐며, 저걸 왜 만든 거냐고요. 뭐긴 뭐겠어요. 대법원장 보고용이죠. 행정처는 큰 범위에서 대법원장의 비서조직입니다. 한마디로 ‘수발’을 드는 게 거기 와 있는 사람들의 임무니까요. 행정처를 움직이는 것은 차장입니다. 그 위에 처장이 있지만 대법관이라 실무 대부분은 차장이 처리하는 구조죠. 대 국회·대 청와대·내부 법관 인사 등등까지 차장이 다 맡아서 처리합니다. 그래서 차장이 대법관 1순위가 되는 겁니다. 원장 입장에선 그만큼 고르고 골라서 쓰고, 나중에는 부려 먹었으니 챙겨주는 거죠. 행정처 차장이 실질적으로 대법원장 비서실장인 겁니다. 그런 행정처에서 저런 문건을 만들었다, 그럼 그게 누굴 보여주기 위한 것이겠어요?”

그런데도 대법관들은 손사래부터 치고 나섰다. 추가조사위 발표가 언론에 일제히 보도된 23일, 대법관 13명이 급히 모여 간담회를 연 뒤 ‘추가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대하여’라는 짤막한 ‘입장문’을 냈다. 이 간담회는 문제의 ‘동향’ 문건을 다룬 언론 보도에 대응하고자 급히 소집된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대법원이 외부 기관의 요구대로 특정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함으로써, 외부 기관이 대법원의 특정 사건에 대한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법원이 이에 영향을 받았다는 취지로 보도하였다. (…) 위와 같은 보도는 사실과 달라 국민과 사법부 구성원들에게 사법부의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에 관한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

요약하면 언론의 사실무근 왜곡보도로 사법부가 어처구니없는 의심과 오해를 사게 됐다는 것이다. 대법관들 입에서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깊은 우려와 유감”은 언론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그런데 간담회에 참석한 대법관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이 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문건 그 자체라는 사실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24일 ‘입장문’을 냈는데, 이 문건을 비롯해 추가조사위 조사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를 사법부 내부에서 해결하겠다고 공표했다.

“재판이 재판 외의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을만한 일이 어떠한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 이번 일이 사법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고 있음을 직시하고 (…) 합당한 후속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조사 결과를 보완하고 공정한 관점에서 조치 방향을 논의하여 제시할 수 있는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이번 사안이 여기까지 밝혀졌듯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추가조사위에 이어 법원 안에 또다시 조사 기구를 꾸려 세 번째 ‘셀프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대법원장의 이런 방침을 두고는 한계가 너무나 뚜렷하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나온다. 우선 청와대와 대법원의 커넥션이 드러난 이 ‘동향’ 문건의 경우엔 조사 범위가 당연히 법원 울타리를 넘어선다. 청와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조사기구를 어떤 사람들로 구성하든,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이든 사법부가 ‘박근혜 청와대’를 조사할 방법은 전무하다.

게다가 이 문건이 작성될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을 지낸 강형주 서울중앙지법원장 등 현직 법관들을 제외하고는 강제조사가 불가능하다. 최고강도 자체 조사인 감찰을 해도 마찬가지다. 가령 문건에 등장하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곽병훈 전 법무비서관 등은 물론이고, 이 문건이 작성된 시점에 법원행정처장이던 박병대 전 대법관, 당시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이 문건을 보고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은 자발적으로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김 대법원장의 다짐처럼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조사를 해도 반쪽 조사나 반의반 쪽 조사가 불가피한 것이다.

“저 커넥션의 전모를 밝히려면 수사 이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가장 좋은 모양새는 대법원에서 스스로 우리 쪽에 수사 의뢰를 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이 수사는 들어간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요. 법원과의 관계 때문에 우리가 먼저 들어가는 것도 위험 부담이 너무 크죠. (농담조로) 나중에 퇴직하고 나면 우리도 변호사 해야 먹고 살지 않겠어요?”(검찰 간부)

이런 사정을 몰라서 김 대법원장이 세 번째 셀프조사 카드를 뽑아 든 것일까. 제법 오랜 기간 판사 생활을 한 중견 변호사의 얘기를 들어봤다.

“대법원장 입장에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수사 의뢰를 하거나 외부의 수사를 수용하게 되면 법원 내부가 격렬한 찬반양론으로 쪼개질 것을 걱정했을 겁니다. 검찰에 고발장이 들어가고 수사 얘기도 나오지만, 법원은 절대 그것만은 안 된다, 수용할 수 없다고 할 겁니다. 판사들 사회에선 ‘나보다 공부 못해서 겨우 검사나 하는 녀석들한테 수사를 받으라고? 우릴 뭐로 알고!’ 이런 인식이 깔려 있어요. 이건 진보, 보수 이런 성향과도 무관하죠.”

그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이겁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에 이미 금이 갔는데, 세 번째 자체 조사 결과를 국민이 믿어주겠냐는 것이죠. 그런데 대법관님들 간담회에서 나왔다는 얘기나 대법원장 입장문을 보면 긴장감이 없어요. 아직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내부의 법관 사찰도 경악할 일이지만, 재판을 가지고 청와대와 협의를 했다는 것은 사법부의 존립이 걸린 문제인데 그런 일 없었다고 말하면 넘어가 진다고 생각들을 하시는 건지…. 밖에 나와 보면 안에서 안 보이던 게 보입니다. 국민이 사법부에 독립성을 부여한 것은 재판을 독립해서 하라는 뜻입니다. 법관들에게 그 밖의 무슨 특권을 준 게 아니죠. 근데 법원 안에서만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이 특권의 소지자인 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착각이죠. ‘국민을 위한 사법’을 입에 올리지만, 여전히 국민은 안중에 없는 겁니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한겨레

‘원○○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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