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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월 40만원에 여관 사는 ‘달방’ 사람들…“동사무소도 파악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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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도 힘든 기초수급자 등 장기투숙…종로 화재로 본 실태

21일 서울 종로구 종로5가의 ㄱ여관. 211호 열린 방문 사이에서 트로트 가락이 새어나왔다. 70대 이명원씨(가명)가 TV 앞에 누워 <전국노래자랑>을 시청하고 있었다. 이씨는 ㄱ여관에서 가장 오래 묵은 장기투숙객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아내와 자녀가 있는 전라도 집에서 나와 이곳 여관에 묵은 지 올해로 21년째다.

ㄱ여관은 지난 20일 방화로 10명의 사상자를 낸 ‘○○장’ 지척에 있다. 숙박비는 ○○장과 같은 1박에 2만5000원. 이씨처럼 장기투숙객들은 한 달치 숙박비를 미리 낸다. 이런 여관방을 ‘달방’이라고 한다. 달로 끊으면 40만원이다. ○○장 여관에서 발생한 사상자 10명 중에도 2년 넘게 ‘달방’ 형태로 거주해온 2명 등 총 3명의 장기투숙자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가 머무는 211호는 방과 화장실을 합해 2평(6.61㎡) 남짓 된다. 바닥에는 이불과 전기매트가 놓였다. 2년 전 길을 걷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친 탓에 침대는 사용하지 않는다. 방 한쪽에는 옷과 책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이씨는 기초생활수급자다. 동생 집으로 하던 주소지를 여관 주인 도움으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기초연금이 더해지면서 한 달에 총 60여만원을 보조받는다. 이 중에서 여관비를 제하면 20만원이 남는다. 그는 “그래도 달방에는 보증금도 없고 전기료, 가스비도 안 낸다. 나 같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이 정도 돈으로 묵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겠나”라고 물었다.

이씨는 “이 동네 장기투숙자들은 60대 이상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ㄱ여관 15개 방 중에서 달방은 6개로, 70대 이씨와 80대 노부부, 40대 남성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60대다.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택배기사인 60대 남성이 유일하다. 지난주에는 달방 하나가 비면서 80대 노부부가 들어왔다. 이씨는 “천운이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여관 주인은 이들 부부가 종로5가에서 장기투숙할 곳을 알아보다 식당 소개로 이곳에 들어왔다고 했다. “○○장과 우리 여관을 소개받았는데 큰일 날 뻔했지. 하마터면 그곳에 묵을 뻔했거든.”

ㄱ여관 주인은 “사연 많고 생활이 녹록지 않은 사람들이 종로에서 가장 싼 숙소를 찾아 이곳으로 온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동사무소에서도 파악을 다 못한다”며 “손님이 밖에 나가지도 않고 불 다 끄고 방에만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 겁이 덜컥 나서 문을 급하게 두들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ㄱ여관처럼 오래된 소규모 여관들이나 유사 숙박시설로 이용되는 고시원이나 독서실 등은 화재에도 취약한 편이다. 건물들이 오래된 데다 불법 개·증축이 많지만, 사실상 소방관리와 규제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이 일대 여관 주인들은 “사고 당일 구청 관계자들이 여관을 둘러보며 점검에 나섰지만 소화기 구비·실내 흡연 여부, 탈출로 등을 점검·확인한 정도”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오전 전북 정읍시 감곡면에선 장애인 가족 3명이 살고 있던 컨테이너에서 불이 나 잠을 자고 있던 지체장애인 ㄴ씨(34)가 숨졌다. 경찰 관계자는 “장애인 가족 3명이 어렵게 컨테이너를 주거공간으로 삼아 살아오던 곳”이라면서 “어떻게 화재가 발생했는지 소방당국과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쪽방이나 여관, 여인숙, 컨테이너 가건물은 우리 사회 취약층을 위한 삶의 마지막 보루”라며 “이러한 것들이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하므로 시설 정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환경을 개선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덕·김찬호·박용근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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