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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한국사의 안뜰] 장원 답안지 위에 올려 '압권'…생활에 스며든 과거 시험 용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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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과거 시험 용어 / 오늘날에도 ‘베스트’ 의미 / 하는 일 없이 멋대로 사는 ‘한량’ / 당시엔 시험만 준비한 수험생 뜻 / 급제 후 관직 못 오르거나 포기 / 통칭해서 ‘선달’·‘처사’라고 불러 / 초시만 합격해도 대를 이어 호칭 / 염원 컸던 만큼 일상 언어로 남아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래서인지 과거시험은 양반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오늘까지 그 흔적이 이어지기도 한다. 유명한 문학 작품이나 기록은 물론 현재 우리의 대화 속에 녹아 있는 말이 그 옛날 과거시험에서 흘러나와 이어진 말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우리 삶 전반에 파고든 ‘시험’에 대한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일보

오늘날 대화 속에 녹아 있는 말 중에는 조선시대 과거에서 유래된 말들이 많다. 사진은 조선시대 함흥에서의 과거시험.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량’은 ‘초시’라도, ‘생원’이면 감지덕지

하는 일 없이 하고픈 대로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 명단인 방목(榜目)을 보면 합격자 이름 앞에 한량(閑良)이라 쓰인 것이 많다. 수문장(守門將), 충의위(忠義衛) 등이 쓰여 있기도 하다. 과거 급제 전의 직업이다. 한량은 과거 합격 당시에 특별한 전력이 없이 시험 준비만 했다는 의미이다. 문과 급제자 앞에 쓰여 있는 ‘유학(儒學)’도 같은 의미이다. 급제할 당시에 공부만 한 ‘수험생’이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와전되어 한량은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한량이다 보니 어떤 시험이라도 통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시험이라도 통과하고 싶은 열망을 담은 단어가 소설 ‘소나기’에 등장한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물장난하고 있는 소녀를 보자 ‘윤초시’네 증손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평화스러운 농촌을 배경으로 도회지에서 온 윤초시 손녀와 시골 소년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소녀의 할아버지, 윤초시라는 명칭이 바로 그 단어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展試) 3차례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초시는 1차시험에서 합격한 사람이란 뜻이다. 과거시험 근처에 가 본 양반 행세는 해야겠기에 초시라는 호칭이나마 붙인 것이다. 과거 급제의 열망은 높았지만 넘을 수 없는 실력의 벽 앞에서 멈춰야 했던 양반의 모습을 반영해 주는 말일 수도 있다. 소나기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과거시험이 폐지된 1894년 이후이기 때문에 소녀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감안하면 윤초시라는 명칭은 본인이 아닌 윗대가 초시에 합격하였고, 그 호칭을 후대도 이어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50~60년대, 소나기가 발표될 즈음 신문에서는 또 다른 과거 용어가 다른 뜻으로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바로 ‘서생원을 소탕하라’라는 쥐잡기 캠페인이다. 당시 흔히 쥐를 ‘서생원’이라 했다. 조선시대에 나약하고 힘없던 생원을 쥐로 의인화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인상과는 달리 생원은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생원은 생원과(生員科)에 급제한 사람에게, 진사는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던 영광스러운 호칭이었다. 생원과는 경전 이해력 시험으로 경서(經書)를 외우게 하고, 진사과는 문학 능력 시험으로 시(詩)를 짓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두 시험을 합쳐 사마시(司馬試) 또는 생진시(生進試)라고 한다. 그런데 시험에 합격하면 생원이나 진사가 되지만 정식 벼슬은 아니고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그래도 어엿한 양반으로 인정받는 의미 있는 호칭이다. 그리고 생진과에 급제한 사람은 성균관(成均館)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과(大科), 즉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받는다. 이러다 보니 생진과에 응시하는 양반이 많았다. 한량보다는 초시가 낫겠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명칭은 생원이었을 텐데 1950년대 윤초시는 그 명칭을 쥐에게 양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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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장의 풍경을 그린 혜촌 김학수의 ‘과거 시험장’. 이야기를 나누거나 무언가를 쓰는 사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 등 시험장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그대의 ‘대책’이 ‘압권’이도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시와 문장을 짓는 능력, 그리고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급제할 정도이면 어느 정도 수준의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급제자들이 몸담을 곳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영욕이 점철되는 현실의 세계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가 시시각각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현실은 문학적 소양만 가지고는 감당하기 어려운 또 다른 세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시험에는 당시의 고민이던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하는 문제를 내기도 했다. 이것이 책(策), 책문(策問)이다. 문과 2차시험에서는 33명을 선발하고 마지막 3차에서는 왕이 직접 등수를 결정한다. 등수 결정을 위해 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데, 이때 보통 ‘책문’이 제시된다.

이 책에 대하여 응시자가 제시한 답이 바로 ‘대책(對策)’이다. 중종이 과거시험에서 ‘올바른 정치를 하는 방법’을 시험문제로 내자, 조광조가 ‘임금 혼자 정치를 하기보다는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하여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제시된 대책 중에는 감탄을 자아내는 것들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대상 중 최고를 가리킬 때 압권이라는 말을 쓴다. ‘압권’ 또한 과거시험 용어였다. 과거시험 응시생 중 2차에 33명을 선발하여 성적순으로 쌓아 올려놓고 임금이 편하게 답안지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보통 2차시험 최우수자가 최종 시험에도 장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장원한 답안지를 맨 위에 올려놓는다. 시험 답안지를 시권(試卷)이라 하는데, 장원을 한 답안지는 그야말로 모든 답안지를 위에서 내리누르는 壓(누를 압) 모양, 곧 ‘압권(壓卷)’이다. 이러한 유래로 압권은 가장 뛰어난 것을 이르는 말이 되어 오늘날 우리도 흔히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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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봉이 김‘선달’과 ‘처사’는?

봉이 김선달은 조선 후기 구전 설화 등장인물로, 평양 출신의 사기꾼이자 건달의 대명사로 불린다. 닭을 봉황이라 속여 욕심쟁이 닭장수를 골탕 먹이고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전설적인 사기꾼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벼슬을 했으나 자신이 원해 벼슬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자리가 없어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급제하고도 관직을 하지 않은 사람을 ‘선달(先達)’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과거시험이 무분별하게 시행되어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전기의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29회, 명종은 22년 동안 26회의 과거를 실시하였다. 반면 조선 후기의 헌종은 15년 동안 23회, 철종은 14년 동안 26회를 실시하는 등 전기에 비해 많은 횟수의 과거시험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급제자의 수도 매우 늘었다. 하지만 관직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급제를 하고도 보직을 받지 못하거나 명예직으로 지내다 은퇴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그래서 벼슬을 얻기 위해 특정 당파에 속하거나 관직을 얻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벼슬을 받지 못하거나 포기하기도 했다. 이들을 통칭한 말이 ‘선달’이다. 지금은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단어지만 그 유래는 어렵고 암울했던 시대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벼슬자리에 아등바등하면서도 벼슬을 못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벼슬하지 않겠다고 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극심한 붕당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은둔하며 제자를 기르는 선비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을 처사, 은사(殷士), 유일(遺逸) 등으로 불렀다. 이들은 덕망과 학식이 높아 존경을 받았으며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 뜻을 두기도 했다.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이 죽으면서 “나 죽거든 비문에 ‘처사’라고만 써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도 전한다. 이 중 처사는 명망 있는 선비를 가리키는 대표적 호칭이 되고 있다.

역사 속에 흔히 나오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과거시험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유래를 확인할 때면 기록을 통해 보는 것 이상의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도 우리의 일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시험처럼 수백년 전의 과거시험이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생활 단어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한없이 중얼거리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급식체나 한동안 유행이 되고 있는 줄임말이 후대에 어떻게 소개될지도 궁금하다.

양창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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