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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송은이가 만든 세상, 주류를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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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이는 올 들어 또 새로운 ‘판’을 벌였다. 웹예능 ‘판벌려’로, 기획자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5명의 개그맨으로 구성된 새 걸그룹 ‘셀럽파이브’를 선보였다.

2015년 중순. 재야 예능계는 팟캐스트 ‘비밀보장’으로 들썩였다. 진행자는 TV에서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던 개그맨 송은이와 김숙.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며 1회차를 내보낸 뒤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전체 팟캐스트 부문에서 청취 순위 1위에 올랐다. ‘엄마 잔소리를 안 듣고 최대한 집에 늦게 가는 법’과 같은 사소한 고민부터 ‘결혼을 앞두고 혼전순결 지켜야 할까요’와 같은 논쟁적 주제까지 망라해 청취자들의 고민을 두 ‘언니’들이 상담해주는 토크쇼.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들의 진지하고 현실적인 답변은 몰입도와 흥미를 높일 뿐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터지는 폭소까지 안겼다. 상담자 비밀을 보장해준다는 취지의 진정성을 표현하기 위해 송은이는 첫회에서 자신의 신체 비밀이라며 ‘짝젖’을 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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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태계 찾아 밥그릇 확보

그해 하반기 개편에서 SBS는 ‘송은이 김숙의 언니네 라디오’를 전격 편성했다. 두 언니의 케미가 지상파 라디오에 스핀오프 버전을 만든 셈이다. 팟캐스트 방송에서 ‘욱하는’ 면모를 보여온 김숙은 비슷한 시기 JTBC <님과 함께>에 캐스팅됐다. 이후 김숙은 가부장을 미러링한 희대의 ‘가모장’ 캐릭터를 탄생시켰고, ‘퓨리오숙’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2016년 방송가를 호령했다. 2017년 예능계를 평정한 ‘스타 김생민’도 비밀보장이 모태가 됐다. 재무나 금전문제를 털어놓는 청취자 고민 상담을 위해 송은이는 ‘영수증’이라는 코너를 마련하고 짠돌이로 소문난 김생민을 전화로 연결했다. 미약한 시작은 KBS 단독 프로그램 ‘김생민의 영수증’이라는 창대한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인생사 만사가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된다. 화려해 보이는 방송계도 마찬가지. 어차피 다 밥그릇 문제다. 그래서 밥그릇과 조응하는 말은 ‘지키’거나 ‘빼앗’거나 ‘싸움을 한다’는 따위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늘상 피도 눈물도 없는 속도전이 벌어지는 곳. 배우나 가수도 아닌 예능인으로, 게다가 40대 이상의 여성에게 그곳은 불모에 가까운 서식지다. 간혹 선심 쓰듯 베풀어주는 알량한 몇 자리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에게 굳게 닫혀 있다. 그곳에서 방송인 송은이(45)는 드물게도 밥그릇을 ‘만드’는 존재다. 불모의 땅을 객토하며 씨를 뿌리고 결실을 얻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는 퓨리오숙과 영수증 요정을 낳은 가이아쯤으로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해 8월 KBS 여의도 별관에서는 ‘김생민의 영수증’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송은이에게 기자들은 물었다. “왜 방송활동이 뜸하냐”고. 그러자 그는 “방송 안 하는 이유는 PD님들에게 물어봐 달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하겠느냐’는 반문과 다를 바 없던 대답. 따지고 보면 이런 류의 질문은 그간의 방송 현실에서 무의미했다. 왜냐고 묻기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데뷔 초기부터 번득이는 재능과 감각으로 동료 개그맨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되어 왔던 송은이지만 2013년 MBC 에브리원 ‘무한걸스’ 종영 이후 그에겐 뚜렷한 출연작이 없었다. 싱글인 그는 종종 “애하고 시어머니가 없어서 방송을 못한다”고 농담처럼 속내를 털어놨고, 팟캐스트에서도 “일이 없다(안 들어온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을 부르지 않는 주류 플랫폼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며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새로운 생태계 개척에 나섰다. 본격적으로 불을 댕긴 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웃기다’고 생각하는 후배 김숙의 좌절이었다. 캐스팅됐던 프로그램에서 이유 없이 갑작스러운 하차를 통보 받아 열패감에 빠져 있던 김숙이 방송활동을 다 접고 하와이로 떠나겠다고 하던 상황. 송은이는 “우리끼리 해보자”고 그를 꼬드겼고, 2015년 4월 팟캐스트 ‘비밀보장’이 세상에 나왔다. 방송의 인기가 수직상승하면서 송은이는 그해 콘텐츠 제작사 ‘컨텐츠랩 비보’를 세우고 대표가 됐다. 지난해 ‘영수증’ 제작발표회에 참석했던 그는 출연자이자 프로그램의 제작자였다.

방송가에서는 그의 성공을 운으로 보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재능과 노력들이 이제야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한다. 1993년 KBS 개그맨으로 데뷔한 그는 유재석, 강호동처럼 ‘절정의 스타’ 자리에 머물렀던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늘상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순발력으로 프로그램과 다른 출연자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했고, 든든하고 의리 넘치는 동료가 돼 줬다. 김숙, 신봉선, 김신영, 김영철, 정상훈을 비롯해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 더 잘 알려진 정성화 등은 ‘송은이 라인’으로 묶일 만한 예능인들로 꼽힌다.

동료들과 의리 깊은 ‘송은이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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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전 KBS PD이자 현 콘텐츠 제작사 몬스터유니온 서수민 예능부문장은 그를 두고 “지치거나 멈추지 않고 매일 꿈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어떻게 하면 내 콘텐츠가 방송에 채택될까’ 하고 고민하게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송은이씨는 그렇지 않아요. 자신이 꿈꾸고 지향하는 세계를 만들고 함께 즐기는 것에 훨씬 관심이 많거든요. 그렇게 구축한 비주류의 작은 세상이 오히려 주류의 거대 골리앗을 변화시킨 셈이지요.”

그는 이어 “‘막 나갈’ 수 있는 비주류의 자율성 대신 건강한 확장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송은이의 내공을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20여년간 SBS 라디오에서 활동해 온 배연아 작가는 “송은이씨는 방송 상황 전체를 파악하고 컨트롤하는 기획자형 방송인이라는 점에서 다른 방송인들과 차이점이 있다”면서 “누군가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찾아낼 뿐 아니라 과제가 생기면 새로운 길을 만들고 돌파해 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올 들어 또 새로운 ‘판’을 벌였다. 웹예능 ‘판벌려’로, 기획자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5명의 개그맨으로 구성된 새 걸그룹 ‘셀럽파이브’를 선보였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됐다. 지난해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오사카 토미오카 고교 댄스팀의 퍼포먼스를 따라하고 싶었던 개그맨 김신영이 고민하다 송은이를 찾아가면서 일이 커졌다. 신봉선, 김영희, 안영미까지 가세하며 ‘셀럽파이브’가 결성됐고, 피나는 연습 끝에 지난 17일 MBC 뮤직 ‘쇼 챔피언’ 오프닝 무대에 섰다. 순식간에 조회수가 90만회를 훌쩍 넘길 만큼 인기가 폭발하면서 ‘셀럽파이브’의 지속적 활동을 요청하는 팬들의 아우성도 높다. 방송가에서는 ‘판벌려’가 앞으로 어떤 판을 벌일지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김숙, 김생민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는 개그맨 박지선과 안영미가 예정돼 있다. 송은이는 일찌감치 올해 이들을 띄우겠다고 공언했다. 송은이가 벌인 판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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