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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상표명은 타이거!”…신발의 주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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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여야의원 5명의 1987



한겨레

우상호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 장례집회에서 이 열사의 영정을 들고 오열하고 있다.


▶관객 600만명을 넘긴 영화 <1987>은 민주주의 함성이 뜨거웠던 1987년의 여러 공간과 사람들을 비춘다. 하지만 영화가 다 보여줄 수 없는 ‘수많은 87년’이 있었다. 이한열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눈물을 삼킨 이가 있었고, 남영동 대공분실의 몸서리치는 기억을 떠올린 이도 있었으며, 노동 현장에서 이 시절을 보낸 이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현직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87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제대 후 복학해 총학생회장 맡아
한열이가 운동권-비운동권 화해시켜


심상정 정의당 의원
구로동맹파업 주도 혐의로 지명수배
부산 노동인권변호사 노무현 만나


최경환 국민의당 의원
강릉교도소 복역 중 박종철 사건
6월항쟁 중 결혼…하객들은 거리로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
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 시절
이한열 노제 때 YS·DJ와 행진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
‘노량진 대입 재수생’ 신분
87년은 시리고 곰삭은 기억으로 남아


여야 국회의원 5명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987년을 돌아보고, 그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마련했다. 의원이 직접 글을 써서 보냈거나(우상호·심상정·최경환 의원), 기자가 의원의 구술(김무성·김용태 의원)을 글로 다듬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내가 있을 자리에 한열이가 서 있었다”

“자, 다음 물건은 운동화 한 짝입니다. 상표명은 타이거! 주인 빨리 나오세요.”

1987년 6월9일 오후 5시20분쯤, 정성원 투쟁위원장이 신발 한 짝을 높이 들었다. 연세대 교문 앞 시위가 끝나고 도서관 앞 민주광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분실물을 찾아주는 순서였다. 시계, 안경, 구두 등 약 10여개의 분실물이 주인을 찾았지만, 그 신발의 주인공 이한열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회장님 큰일 났어요. 학우 한명의 상태가 위급하대요.” 오후 5시40분쯤 하얗게 질린 학생이 총학생회실로 뛰어 들어왔다. 다음날 6월10일 가두집회 준비상황을 점검 중이던 나는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갔다. 담당의사가 말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족을 부르셔야겠어요.”

그렇게 우리의 슬픈 6월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거리에 나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밤에는 병원을 지키는 27일간의 여정이 이어졌다.

‘제발 한열이를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였다. 절대 물러서지 말자고 학생들을 선동해놓고, 최루탄이 터지자 관행처럼 제일 먼저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던 내가 미웠다. 부끄러웠다. 내가 있을 자리에 한열이가 서 있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다쳤다고 생각하니 한열이의 가족을 무슨 낯으로 뵐까 두려웠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6월10일부터, 우리는 중무장하고 달려오는 경찰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화염병도, 각목도, 돌도 필요 없었다. 수만명, 수십만명, 수백만명이 제2, 제3의 이한열로 변해갔다. 그 27일 동안 밤 12시에서 1시 사이, 세브란스병원을 지키는 1000여명의 학생들 사이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뭉클했는지 모른다.

“나는 너희들 운동권이 너무 무서웠어. 화염병 던지고 불이 확 번지면 정말 나랑 거리가 먼 사람들인 것 같았거든. 나도 민주주의를 바라지만 감옥에 끌려갈까봐 두렵기도 하고…. 그동안 미안했어.”

“아니야. 나도 민주화운동에 함께하지 않는 너희들을 미워했었어. 아무 생각도 없는 무뇌아들이라고 비웃었거든. 미안하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한열이가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화해시키고 있었다. 함께 밤을 새울 수 없는 여학생들 중에는 아침마다 엄마와 함께 김밥을 준비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 벽이 허물어지자 작은 물결이 해일로 변해갔다.

군대를 다녀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얼떨결에 총학생회장이 된 나는, 그해 6월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들은 나를 6월항쟁의 주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주역이 아니었다. 소리없이 숨죽여 있다가 용기있게 일어선 수많은 ‘그들’이 진정한 주역이었다.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지 6일 만에 이한열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7월9일 100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그의 영결식과 노제가 진행됐다.

30년이 지난 2016년과 2017년 촛불광장에서 한열이 어머니를 만났다. “상호야, 원내대표 잘해라. 네가 잘해야 세상이 바뀐다.”

한열이가 학생운동에 참여한 기간은 불과 1년 몇 개월, 어머니는 그 자식을 대신해서 30여년을 풍찬노숙했다. 나는 어머니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어머니, 이미 세상이 바뀌고 있어요. 광화문에 수백만명의 한열이가 다시 촛불을 들었잖아요!’

영화 <1987>를 보다가 이한열이 피격되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 그 사람들을 향해 하늘에 있는 한열이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울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심상정 정의당 의원

청년 노동자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시청 광장은 수많은 상기된 얼굴들로 가득했다. 그 속에 나도 있었다. 5년째 숨어 다니던 수배자였다. 나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다. 구로동맹파업 때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 지붕을 타고 피신했고, 86년 기무사가 서울노동운동연합 조직원들을 덮쳤을 때는 철조망을 넘어 올림픽대로로 도망쳤다. 나는 가까스로 검거를 피했지만 잡혀간 동료들은 심상정의 은신처를 대라고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쫓기는 수배 생활보다 고문을 겪은 동료들 때문에 견딜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한겨레

1990년 12월 심상정 전국노동조합협의회(민주노총의 전신) 쟁의국장이 노조 쟁의부장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전노협은 6월 항쟁 이후 본격화된 노동 자 대투쟁의 결실로서 1990년 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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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날이 왔다. 수십만명이 꽉 메운 거리는 나 같은 수배자들에게 ‘해방구’였다.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울며 구호를 외쳤다. 물고문, 전기고문 받은 동료·후배 민주주의자들을 향한 찢어질 듯한 심정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때 나는 스물여덟이었다.

87년 6월은 청년들의 죽음으로 열린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직선제 쟁취’만으로 다소 협소하게 수렴됐지만,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노동 현장을 살려내는 한줄기 빛으로 이어졌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숙명이라 생각했던 청년 노동자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공장 담벼락은 이 구호로 도배가 되었다. 울산의 노동자들은 중장비를 끌고 시청 앞으로 나아갔다. 87년 7월, 8월,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열린 것이다. 그 과정에 또 젊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거제에서 조선소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숨졌다. 스물둘 청년이었다. 그런 죽음 앞에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 맞섰다. 여전히 수배 중이었지만, 나는 그 현장을 부지런히 뒤집고 다녔다. 그때 만났던 부산의 노동인권변호사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노동조합만 만들면 오물 세례를 받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고문을 당하던 시절을 딛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전국에 3000여개의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후 급성장한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바탕으로 90년대 초중반까지 노동소득은 계속 늘었다. 그 시기가 한국 경제가 가장 풍요로웠으며 평등을 향한 열망이 가장 뜨겁게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그렇게 87년은 대통령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변화에 대한 희망을 만들었다. 그날로부터 30여년이 지났다. 불의와 불평등에 시달리던 한국의 청년들과 시민들은 이제 대통령도 바꾸었다. “평등한 세상이 민주주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님의 말씀처럼, 촛불로 대통령도 바꾼 청년, 노동자들이 이제 자신의 삶을 바꾸는 평등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리라 믿는다.

최경환 국민의당 의원

최루탄 냄새로 가득 찼던 결혼식장

“휴전선에 풀어놓고 월북하는 놈 쏴죽였다고 하면 그만이야.”

영화 <1987>의 이 대사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상으로 들었던 공포였다. 나는 1981년 ‘학림사건’으로 그곳에서 30여일간 공포와 체념으로 지내야 했다. 고문기술자도, 고문당하는 사람도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강릉교도소에 있던 87년에는 박종철 물고문 살인이 벌어졌다. 분노의 물결이 일렁이던 87년 3월 나는 두번째 감옥에서 만기출소했다. 후배들의 눈은 울분으로 충혈돼 있었다. 대학생을 고문해 죽이고 은폐한 정권 앞에서 시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졌다. 나는 시민들의 응원과 넥타이부대의 참여를 보면서 이번에는 80년 5월 광주처럼 당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의 광주처럼 군인들이 나올 거란 수군거림에 공포도 밀려왔다. 나는 경찰들이 쉴새없이 최루탄을 쏘아대던 87년 6월의 한복판이던 6월22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연일 이어진 시위에 참가하면서 준비한 결혼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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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국민 의당 의원은 박종철 열사가 숨졌을 때 강릉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사진은 감옥 안에서 칫솔대를 시멘트 바닥에 갈아 만든 칫솔 목걸이. 출소 뒤 약혼자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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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학림사건으로 남영동에 끌려가 함께 고생한 동료였다. 거리에서 시위하던 신랑신부의 후배들이 식장으로 몰려왔다. 선배의 결혼도 축하할 겸 땀도 식히고 허기도 채우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식당은 후배들의 옷에 묻은 최루탄 냄새로 가득 찼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며 식사를 했다. 그리고 또 거리로 나갔다. 1987년 6월이 지난 뒤 우리의 목표가 달성되었거나 우리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시민들만이 누릴 수 있는 명예이고 축복이다.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

경찰이 쓰레기장 한복판에 버려놓더라

박종철 빈소를 서울 무교동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사무실에 차렸다. 데모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면 죽도록 얻어맞았다. “독재의 주구”라며 일단 경찰 책상부터 뒤집어놓았으니까. 그때는 악만 남았다.

나는 전두환 독재정권 서슬이 시퍼렇던 198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운영하던 민족문제연구소를 내 발로 찾았다. 그때 군부독재를 향한 민주화 투쟁은 희망이 거의 없었다.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민추협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투쟁했다. 그리고 박수만 치던 넥타이부대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걸 보고 ‘아 이제 독재정권이 무너진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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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 당시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가운데). 사진은 사복 무장경찰(백골단)에게 폭행당한 뒤 연행된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통일민주당 청년국장 등과 풀려나오는 장면을 누군가 사진으로 찍어둔 것이다.


모월 모시 어디서 집회가 있다고 하면 기관원들이 내가 살던 서울 연남동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대문 앞을 지켰다. 옆집의 옆집 담을 넘다가 옷이 찢어지기도 했다. 명동 미도파에서 집결해 명동성당까지 행진하는데,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면 명동에 많이 있던 지하다방으로 피해 들어갔다. 지하로 최루탄 수십발을 쐈다. 아이고, 말도 마소. 사람 반 죽는다. 한번은 백골단이 몽둥이를 들고 오니 국회부의장을 하셨던 김재광 전 의원 승용차로 함께 올라탄 뒤 문을 잠갔다. 경찰이 레커차로 들어올려 난지도 쓰레기장 한복판에 버려놓더라.

이한열이 죽은 뒤 노제를 위해 연세대에서 시청광장까지 걸어갔다. 날이 더웠다. 와이에스(YS)는 괜찮은데, 다리가 불편한 디제이(DJ)는 힘들어하면서도 계속 걸었다. 동교동계 권노갑 고문이 영화 <1987>을 보시고 민추협 활동이 전혀 소개가 안 됐다며 섭섭해하시더라. 하지만 우리 잘못이다. 양김이 싸우다 보니 갈렸다. 이름 없는 희생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보다 그분들이 부각돼야 옳다.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

그날 끝내 차도로 내려가지 못했다

1987년 6월 나는 그때 그곳에 없었다. 재수생이었다. 노량진 대성학원과 바로 뒤에 있던 하숙집이 내가 있을 곳이었다. 재수생이라도 귀는 있다. 피가 끓었지만 대학생 아닌 재수생은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밤늦게까지 자습을 했다.

어느 날 같은 하숙집 앞방 재수생의 대학생 친구가 최루탄에 범벅이 된 채 하숙방으로 왔다. 전경에 쫓기다 도망왔다고 했다. 최루탄 냄새에 콜록거리며 소주를 마셨다. 재수생들은 대학생 친구의 무용담을 부럽게 경청했다. 최루탄 때문이 아니라 자괴감 때문에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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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1987년 당시 재수생이었다. 사진은 1987년 2월 김 의원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


다음날 서울 올라와 처음으로 자습을 땡땡이쳤다. 역사의 현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은행 분수대 앞이 최고의 현장이었다. 페퍼포그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민주시민 여러분, 도로로 내려서시기 바랍니다. 동참합시다.” 인도에 서 있는데 넥타이를 맨 회사원이 소리쳤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 사람들이 한둘씩, 그러더니 우르르 차도로 내려가더라. 그날 나는 끝내 차도로 내려가지 못했다. 15㎝에 불과한 보도턱이 몇 길 낭떠러지 같았다. 명동에서 노량진까지 터벅터벅 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라한 청춘의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나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날 하숙방으로 들어가는 손에는 소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깡소주를 마셨다.

나는 국민 모두가 참여한 곳에 있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면 꼭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수 끝에 91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서클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하는 말들이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보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길은 현실변혁정치를 표방한 민중당과 경실련이었고, 김영삼 정부의 문민개혁 동참이었다. 1987년은 나에게 아린 추억, 시리고 후지고 곰삭은 기억으로 남았다.

정리 송호진 김태규 김남일 송경화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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