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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자식 남겨두고 월북이라뇨?”…잊혀져간 납북자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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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납북자 68년의 아픔](상)연좌제에 오해와 감시, 보상 없이 눈감은 그들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키고 물밀 듯이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 인민군은 정치인과 공무원, 언론인 등 소위 ‘엘리트’를 강제로 납치했다. 치밀한 사전 계획을 통한 조직적 기획납북이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납북자 가족들은 생이별의 아픔도 모자라 월북한 게 아니냐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직장에 취직하기 어려웠고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연좌제로 고통 받으며 무려 68년 동안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숨죽여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지나칠 만큼 납북자와 가족들에게 소극적이었다. 조속한 보상 및 지원 대책 마련으로 이들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이낸셜뉴스는 3차례에 걸쳐 이들의 실태와 개선책 등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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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납북자 박영랑씨(본명 박영근) 부부의 사진 /사진=박민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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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월북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60년 이상 세월을 기다린 어머니는 결국 명예회복조차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6·25전쟁 발발 한 달 만에 인민군에 끌려가
박민우씨(74)는 6세 때 부친 박영랑씨(본명 박영근)와 헤어졌다. 6·25전쟁 발발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1950년 7월 19일께로 추정된다. 갑자기 서울 관훈동 자택에 북한 인민군들이 들이닥쳤고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 갔다. 박씨는 “아버지가 인민군 지프차에 강제로 타는 것을 보고 뒤쫓아 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고 회상했다. 박씨가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박씨 아버지는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전부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 문화정보사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독립혈사 1, 2권을 출간했다. 독립혈사는 항일독립투사들의 애국적인 활약을 대내외에 알린 독립운동사료집이다. 박씨는 “아버지는 당시 인민군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도 피신하지 않으셨는데 피신했을 경우 우리 가족이 무사했을까 싶다.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박씨 어머니는 3년간 서울을 떠나지 않고 새벽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남편이 돌아오길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납북자 가족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늘었고 결국 서울을 떠나 충북 진천으로 향했다. 각각 6세, 4세, 1세 아들 3형제에 막내아들까지 임신한 상태였다. 박씨는 “아들 셋에 아내까지 두고 월북할 사람이 어디 있나. 더구나 언론인으로 출판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을 때였다”며 “어머니는 뱃속에 아기까지 있어 우리를 데리고 피난도 갈 수 없었다”고 전했다.

가장이 된 박씨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언제나 납북과 월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야 했다. 입대할 때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될 때도 2, 3차례에 걸친 고강도 신원조회는 기본이었다. 그 때마다 외삼촌이 보증인으로 나서 해결될 수 있었다. 항상 주시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 주변의 오해와 따가운 시선 속에 살아야 했던 박씨의 아픔은 2016년에야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었다. 2011년부터 정부가 실시한 납북 피해 신고를 통해 아버지가 자발적 월북자가 아닌 납북자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박씨는 아버지 명예가 회복된 것에 안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어떤 보상이나 지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납북 피해 신고 당시 보상을 생각하고 신청했는데 명예회복만으로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그동안 국가가 내버려뒀다는 것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어 “60년 이상 아버지를 기다린 어머니는 결국 명예회복조차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며 “독립혈사 합본을 만들어 독립운동가 가족들에게 돌리고 싶은 꿈이 있다. 그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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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혈사 사본 /사진=박민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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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납북자 10만명, 공식 인정은 4777명 불과
월북자 가족이라는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은 박씨 뿐만이 아니다. 14일 통일부에 따르면 전시 납북자는 약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전시 납북자로 인정받은 인원은 전체의 5% 정도인 4777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고령이 된 가족들조차 생을 마감한다면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납북자 가족들을 돕고 있는 김규호 선민네트워크 대표는 “6·25전쟁 당시 충분히 피난갈 수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다가 인민군에 납북되신 분들이 대다수”라며 “납북자와 자진 월북자를 도매금으로 묶어 처리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연좌제 피해는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jun@fnnews.com 박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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