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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코리아] 구덩이를 매우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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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괴물', 투자자는 '구세주'… 구덩이에 숨어있는 것 아직 몰라

'새로움'은 때때로 공포스러운 것, 대체 뭐가 들었는지 좀 따져보자

조선일보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공산당도 아니고…" "있는 자들이 간여했겠죠" "돈 뺄 시간은 줘야지. 이렇게 갑자기" "그러라고 하세요. 외국에서 하면 되니까"

'정부가 가상 화폐 거래소를 폐지할 방침'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11일 조선일보 기자들이 비트코인 투자자들을 만났더니 이런 말이 나왔다. 인터뷰 끝에 "이름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도박꾼이 된 건데, 도박꾼이 이름 대겠습니까?"

청와대 국무조정실장이 '거래실명제 도입, 거래소 폐쇄 특별법 검토'를 발표한 게 지난해 12월 28일이다. 약 2주 후인 11일 법무장관이 이 내용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11일 오후부터 청와대가 슬슬 발을 빼더니, 12일부터는 대놓고 '코멘트 하지 않겠다'고 한다. 300만명으로 추산되는 암호 화폐 투자자들이 패닉에 빠졌고, 울부짖으며, '문재인 반대'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들판에 불을 질렀는데, 바람이 사람 쪽으로 불고 있다. 손가락만 델지, 전신 3도 화상을 입을지 모를 일이다. 정부가 들판을 태우기로 한 건, 거기 위험한 게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걸 도박판이라는 '괴물'로 보는데, 투자자들은 '구세주'라 추앙한다. 금지론자들은 "이건 실체가 없다"고 비난한다. 투자자 혹은 투기꾼들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이걸로 커피값을 낸다"고 반박한다. 없던 길 앞에 '어서 가자'는 쪽과 '가면 죽는다'는 쪽으로 갈렸다.

독일 엔지니어 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Daimler)가 1880년대 가솔린엔진을 단 초기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 그 속도는 시속 10㎞ 내외였다. 보통 사람 뛰는 속도다. 시카고에 자동차가 등장하자 마주, 마차 주인, 마차꾼들이 '위험한 기계'를 비난하고 공장을 습격했다. 1903년에는 자동차 때문에 말이 놀라 사고가 난다며 자동차 주행을 금지시켰다.

미국에서 상용기 서비스가 시작되자, 철도회사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면 다 죽는다"며 비행기를 헐뜯었다. 그래도 떠난 손님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옷을 파는 사업을 한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면박 주고, '미국에서는 이미 그런다'고 하면 "한국이 미국이냐" 반박하던 게 20년도 안 된 일이다. 신기술은 자주 '공포'를 몰고 온다.

가상·암호 화폐는 '불온한 물건'이다. 가상 화폐엔 국적이 없다. 한국이 원화를, 미국이 달러를 발권하는데, 이 권력을 정체 모를 '불한당'들이 쥐고 흔든다. 1960년대 '히피' 정신이 반전 반핵 운동 선두에 섰다면, '가상 화폐'는 국가의 화폐 발행권과 재정권을 뒤흔들 것이다. 돈의 무정부 시대가 오고 있다.

전 세계 모든 정부가 고민할 문제다. 미국이나 일본은 고민 끝에 '제도권'으로 넣어 울타리를 쳤다. '인터넷을 막지 못했듯, 인터넷 화폐도 막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덜 잘살고, 인터넷이 매우 발달했고, 공산당 정부가 지배하는 중국, 베트남은 이걸 봉쇄했다.

우리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중국이나 베트남 투자자들이 외국에서 거래하거나, 거래소 대신 뒤로 개인끼리(P2P) 거래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막으려면 개인 컴퓨터를 압수 수색하면 된다. 막대한 비용과 반발이 뒤따를 것이다. 투기장이나 도박장이라고 봤으면, 걸맞은 대책을 내놓는 게 정부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구덩이에서 뭔가 나오고 있는데 그게 샘물인지, 원유인지, 독극물인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다른 나라나 전문가들이 뭐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하는지 연구는 좀 했나. 구덩이부터 막고 보는 이 대장부다운 '공구리 쳐라' 발상은 대체 누구의 창의적 아이디어인가.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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