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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Why] 내 청춘의 김밥, 1000원 한 장에도 행복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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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맛집 등 명소 잇단 폐업

프랜차이즈에 밀려

16년 된 梨大 '이화사랑', 50년 된 서울대 '솔밭식당'

26년 된 경희대 찻집 '녹원'… 학생 입맛도 변해 문 닫아

학생들이 되살리기도

서울대 찻집 '다향만당' 폐점 반대 서명운동

고대 햄버거집 '영철버거' 크라우드펀딩으로 부활

조선일보

11일 영업 종료를 1주일 남겨둔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캠퍼스 내 ‘이화사랑’ 매장 안 모습. 이 학교 명물로 소문난 참치 김밥도 이제 더는 맛보기가 어려워졌다. 대형 프랜차이즈 등의 등장으로 대학가(街) 명물들이 사라지고 있다. / 조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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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김밥 한 줄이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니까요."

지난 10일 서울 이화여대 이화·포스코관 지하 1층 '이화사랑'. 재학생 이다현(26)씨가 참치김밥을 보며 말했다. 이곳은 100여 평(330㎡)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 30여 개를 두고 김밥과 샌드위치, 커피 등을 저렴하게 판매해 온 학내(學內) 카페테리아다. 학생들은 여기서 수다도 떨고, 끼니도 때우고, 노곤해진 몸을 낮잠으로 달래기도 했다. 이씨는 "이대생들에겐 한때 '영혼의 안식처'라 불렸다"고 했다.

이화여대의 명물 '이화사랑 김밥'이 오는 17일 문을 닫는다. 매장엔 '내부 사정으로 1월 17일 영업을 종료합니다. 그동안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2002년 3월 문을 연 이화사랑의 간판 메뉴 참치김밥은 "팔뚝만 한 굵기에 참치가 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푸짐했다. 마요네즈를 뿌려 먹는 방식도 인기를 끌었다. 처음 참치김밥을 팔았을 때 한 줄 가격이 1000원.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웃 연세대·서강대 학생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많을 땐 하루 평균 1000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참치김밥은 2014년에 2500원까지 올랐다. 주재료인 참치를 비롯해 김·쌀·우엉·단무지 등을 모두 국산으로 맞추려다 보니 굵기도 양도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선 "이화사랑 김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돌았다. 김밥 판매량이 3분의 1로 급감했고, 지난해 초엔 "가격 상승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불매 운동까지 벌어졌다. 진미채김밥, 연어김밥 등 메뉴를 다양화했지만 학생들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화사랑이 없어진 자리엔 도시락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프랜차이즈에 밀려나는 대학가 명물들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대학가 맛집과 노포(老鋪) 등 추억의 '명물'들을 밀어내고 있다. 10일 저녁 서울 안암동 고려대 캠퍼스 앞. 이 학교 주요 상권인 인촌로 24길(일명 '참살이길') 500m 구간 양쪽을 대형 프랜차이즈 계열 커피숍과 주점, 음식점 등 100여 개 업체가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같은 시각 고려대 정문 앞 제기시장. 과거 '막걸리촌'이라 불리며 밤마다 술을 마시는 학생들로 불야성을 이뤘던 곳이다. 대(代)를 이어 수십 년씩 영업하는 밥집과 막걸리 선술집 등이 모여 있었다. 가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 지금은 10여 곳만 남았다.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캠퍼스 안쪽도 점령 중이다. 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2015년 12월 기준 서울지역 대학 내에 입점해 있는 외부 업체는 모두 450개다. 2005년 대학 설립에 관한 운영 규정이 개정되면서 학교 기업의 사업 금지 업종이 102개에서 19개로 크게 줄어든 데 따른 결과다. 2015년 완공된 연세대 백양로 지하 공간엔 대기업 계열의 대형 커피숍과 빵집, 주스 가게 등이 입주했다. 연세대 안엔 일반음식점 20곳과 휴게음식점 37곳이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형 상업시설이 대학 안으로 들어오고 캠퍼스 외부에 있는 가게들이 저가(低價) 공세를 벌여 전통의 '명물'들 입지가 애매해졌다"고 했다. 2016년 12월 문 닫은 50년 역사의 서울대 국밥집 '솔밭식당'이 대표적이다. 이 국밥집은 서울대 관악캠퍼스가 들어서기도 전인 1968년 관악골프장 내 식당으로 출발했다. 5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순댓국, 열무국수, 소고기국밥 같은 메뉴를 내왔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학생 시절부터 이 가게 단골이었다. 이 식당 사장 나정혜씨가 2013년 건강 악화로 물러나자 서울대 생활협동조합에서 이어받아 운영했지만 경영난 끝에 3년 만에 폐점을 결정했다.

1990년 3월 경희대 앞에 터를 잡은 전통찻집 '녹원'은 모과차 달이는 냄새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벽면은 학생들의 낙서로 가득했다. 이 학교 졸업생 강만식(42)씨는 "선후배와의 추억, 여자 친구와의 낭만이 녹아 있는 곳이었다"고 추억했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골목에 속속 등장하면서 상권을 잠식했다. 녹원은 경영난을 겪다 개업 26년 만인 2016년 문을 닫았다.

조선일보

지난 2016년 경희대 앞에선 26년 업력(業歷)의 전통찻집 ‘녹원’(왼쪽)이, 서울대에선 48년 된 국밥집 ‘솔밭식당’이 문을 닫았다. / 인터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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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흐름 vs 부활 몸부림

학생들 반응은 엇갈린다. 10일 이화사랑엔 영업 종료 소식을 들은 졸업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대학 동창 셋을 붙잡고 다시 학교를 찾았다는 황수민(35)씨는 "공부하고 과제 하고 화장하고 수다 떨던 곳이다. 학교 생활의 거의 전부였는데, 아름다운 추억을 담아 가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소셜미디어(SNS)엔 "이화인들이여 출동하라" "폐점 전 마지막 이화사랑 원정대를 모집한다"는 글들이 수백 건 올라왔다.

"대학가 명물들이 프랜차이즈에 밀려나는 게 가슴 아프지만 시장 논리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는 의견도 있다. 대학생 김제호(27)씨는 "추억팔이로 감상에 젖는 것보다는 (프랜차이즈 매장의) 현대식 인테리어와 깔끔한 서비스에 더 끌리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김씨는 "대학가 '노포'들의 위생과 가격 경쟁력이 예전만 못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밀려난 명물들이 학생들에 의해 부활한 사례도 있다. 고려대 앞 수제 햄버거집 '영철버거'는 2015년 한 차례 폐업했다. 이 가게 사장 이영철씨는 2002년 장사를 시작한 뒤 10년 넘게 고려대에 매년 장학금 2000만원을 기부해 온 인물. 폐점 소식을 들은 학생회가 모금에 나섰다. 크라우드펀딩(소셜미디어를 통한 온라인 모금 활동)으로 약 7000만원을 모았고, 2016년 초 영철버거는 6개월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2000년 서울대 두레문예관에 문을 연 전통찻집 '다향만당'은 2016년 수익성 악화로 폐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서울대 재학생 600여 명이 폐점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학교 측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영업 재개를 결정했고,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홍보와 영업을 도왔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00% 이상 상승했다.

[김은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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