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Why] "主君은 모르는 일"… 의원 보좌관 입에서 나온 호칭에 검사도 깜짝

댓글 7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비리 혐의 국회의원들 생사는 보좌관에 달렸다는데

보좌관이 뒤집어쓰면 돈받은 사실 드러나도

의원은 "보좌관의 일탈" 사과만 하고 빠져나가

보좌관의 심리 변화

의원이 지켜줄거라 믿어 모르쇠로 일관하다

하나둘씩 증거 드러나고 의원도 발뺌하면서 흔들

구조적인 유착 고리… 대부분 추천 통해 들어와

의원 마음대로 교체 가능, 불평등이 주종 관계로

조선일보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검 14층 첨단범죄수사1부 조사실.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보좌관을 지낸 윤모씨의 진술을 듣던 검사는 귀를 의심했다. 윤씨는 2015년 전 전 수석이 회장·명예회장을 지낸 한국e스포츠협회에 롯데홈쇼핑이 3억3000만원을 후원하도록 요구하고 이 중 1억1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검사가 놀란 것은 전 전 수석을 '의원님'이라 부르던 그가 갑자기 '주군(主君)'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 전 수석의 개입 여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윤씨가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이 검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압축해놓은 이 호칭을 듣고, 전 전 수석에 대한 수사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전 전 수석에 대한 검찰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검찰은 그에 대해 지난해 11월과 12월 뇌물 수수 혐의로 두 번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법원은 "보좌관의 행위에 대한 피의자의 인식 정도나 범행 관여 범위 등 피의자의 죄책에 관해 상당 부분 다툴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롯데홈쇼핑 등이 한국e스포츠협회에 돈을 건넨 것은 문제라고 인정하면서도 전 전 수석의 개입에 대해선 물음표를 붙인 것이다.

검찰은 롯데홈쇼핑과 GS홈쇼핑이 한국e스포츠협회에 각각 3억3000만원과 1억원을 건넨 사실을 밝혀냈지만 이 돈을 빼돌린 사람으로 윤씨를 지목했을 뿐 전 전 수석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윤씨가 입을 닫기 때문이다. 검찰은 윤씨가 전 전 수석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보좌관의 힘이 세다고 해도 의원의 지시나 허락 없이 공적 협회 자금에 손을 대기는 어렵다"고 했다. 더욱이 윤씨는 30대 중반으로 보좌관 중에서도 어린 편에 속한다.

나는 모르는 일, 보좌 직원 개인 일탈

전 전 수석에 대한 수사에 착수할 때만 해도 검찰은 구속 사유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뇌물 공여자인 강현구 전 롯데홈쇼핑 사장으로부터 관련 진술을 받아냈고, 한국e스포츠협회와 롯데 측으로부터 확보한 자료도 충분했다. 살아 있는 권력인 현직 정무수석에 대한 공개수사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고비마다 윤씨가 또렷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서 결정타를 날리지 못했다. 한국e스포츠협회 조모 사무처장으로부터 '윤씨가 회장님(전 전 수석) 선거자금이 필요하니 1억원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의원실 비서와 인턴의 월급을 협회에서 대납한 것도 확인했지만 전 전 수석의 지시 여부는 명확하지 않았다. 전 전 수석은 "전직 비서들의 일탈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저는 그 어떤 불법에도 관여한 바가 없다"고 했다. 검찰은 분했지만 뾰족한 수는 찾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이런 일탈과 사과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0년 전 전 수석의 보좌관이자 동서지간이었던 임모씨는 그해 지방선거를 전후해 불법 정치자금 2억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비서관 이모씨도 같은 해 7월 재개발 관련 주택법 개정 대가로 노량진주택조합 측에서 1억7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두 사람은 각각 대법원에서 징역 8개월과 4년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들이 철저히 개인적 범행임을 주장하자 검찰도 더는 수사하지 못했다. 전 전 수석은 당시에도 서면 조사만 받은 뒤 연루 의혹을 벗었다.

보좌관 입에 수사 성패 달렸다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에는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보좌관 등 보좌 직원을 둔다'고 말하고 있을 뿐 보좌관의 정의나 업무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국회의원의 법안 발의나 지역구 관리, 의정 활동을 돕는 것에서부터 개인 일정 등을 챙기는 등 맡은 일이 많다. 보좌관은 그중에서도 중추 역할을 한다.

자연히 수사의 성패도 이들의 진술에 큰 영향을 받는다. 제대로 된 진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범죄를 일부 밝혀내고도 정작 해당 의원은 법망(法網)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생긴다. 의원들이 수사 초기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으레 발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술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검찰이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보좌관들의 심리 상태다. 의원들보다 먼저 구속된 보좌관은 심리적으로 쫓기는 상태가 된다.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조사실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부분을 파고드는 것도 수사 기법이다.

10억원대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이우현 자유한국당 의원의 보좌관 김모씨도 처음엔 이 의원 지키기에 필사적이었다. 지난해 10월 검찰은 김씨의 자택을 압수 수색했다. 당시 김씨는 검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치자 갑자기 노트 한 권을 입으로 물고 뜯기 시작했다. 찢어진 노트 일부를 삼키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노트가 발견되면 자신은 물론 이 의원까지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검찰 역시 끈질기게 2, 3차 압수 수색을 했고 결국 김씨가 작성한 또 다른 노트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엔 공천 희망자 20여 명의 리스트와 이 의원 측에게 건넨 돈의 액수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구속 후 보름간 묵비권을 행사했다.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트에 적힌 메모들이 구체적인 데다 이 의원이 계속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자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이 부분을 파고든 검찰은 끈질긴 문답을 통해 이 의원과 관련된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난달 20일 검찰에 출석하는 순간까지 "다 보좌관이 한 일이고, 다 보좌관이 데려온 사람들이고 저는 모른다"고 말했던 이 의원은 조사 후 이런 사실 관계를 추궁당하자 '미안하다'고 말을 바꿨다. 이 의원은 지난 4일 구속됐다.

2015년 분양 대행업자 김모씨에게 시계와 안마 의자 등 3억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박기춘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발목을 잡은 것도 보좌관 진술이었다. 박 전 의원의 보좌관은 '의원님 지시를 받고 안마 의자를 숨겼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소방 설비 업체 대표 김모씨로부터 한전에 납품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부탁과 함께 3000여만원을 받아 2010년 기소됐던 최철국 전 민주당 의원도 '김씨로부터 건네진 돈 중 일부가 사무실 운영비 등으로 쓰였다'는 내용의 보좌관 진술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경우다.

국회의원·보좌 직원 유착은 구조적 문제

국회 보좌 직원은 공무원 시험을 통해 뽑히는 일반직 공무원들과 선발 방식이 다르다. 관련 법에도 임용 절차에 대한 구체적 규정이 없다. 이러다 보니 보좌관이나 비서관은 선거나 지인의 추천을 통해 의원실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형식적 임기는 국회의원 임기와 같은 4년이지만, 실제로 국회의원의 의사와 의원실 상황에 따라 쉽게 교체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보좌관이나 비서관이 국회의원의 뜻을 거스르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 둘의 유착 관계가 생기는 것도 이런 구조적 불평등 관계 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유착은 국회의원이 다선일수록, 계파의 선두에 있을수록 짙어진다. 친박 핵심이자 4선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 보좌관 정모씨가 대표적 경우다. 그는 최 의원을 지키려다 자신이 기소돼 실형까지 선고받았다.

최 의원은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 직원 황모씨의 채용 청탁을 한 혐의로 지난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보좌관 정씨는 이 일이 문제가 돼 중진공 간부들이 기소되자 일을 꾸몄다. 지난해 5월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는 중진공 간부 전모씨에게 '의원님이 연결되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식으로 허위 증언을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실제 이 간부는 정씨의 요구대로 최 의원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등 재판에서 허위 증언을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검찰 조사로 드러나면서 정씨는 위증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최 의원 역시 채용 청탁 혐의가 드러나며 기소돼 선고를 앞두고 있다. 최 의원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 1억원을 받은 혐의까지 드러나 지난 4일 구속 수감됐다. 두 사람 다 결국 철창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김아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