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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800년 전 베트남 '리 왕조'서 한국 '화산 이씨' 나온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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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 첫 보트피플

13세기 한국 도망온 왕자 이용상

옹진 화산포 상륙하며 성씨 얻어

한국·베트남은 오랜 혈맹

임란 때 전사 13세손 이장발 유적 등

응웬 대사, 선조 혼 깃든 장소 순례

문 대통령도 양국 관계 언급

한국 남아 있는 후손 1200여 명

경기·서울·경북 등 전국에 분포


[뉴스 속으로] 800년 전 베트남 ‘리 왕조’ 흔적 찾아 … 화산 이씨 마을서 하룻밤

주한베트남 대사가 영주·봉화 간 까닭

지난 4일 응웬 부 뚜(Nguy?n V? Tu) 주한베트남 대사가 경북 영주시와 봉화군을 1박 2일 일정으로 방문했다. 베트남 대사가 지방 중소도시를 찾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방문은 표면적으로 지역과 베트남 간의 경제 교류 확대 방안, 베트남 국적 결혼이주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논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응웬 대사는 상당 시간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선조들의 흔적을 찾는 데 할애했다. 베트남 역사 최초의 통일왕조 흔적들이다. 이웃 나라인 중국·일본의 유적들은 국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베트남의 흔적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직선거리로 무려 3000여㎞ 떨어져 있는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의 흔적이 한국에 존재하게 된 것은 어떤 사연에서일까.

◆베트남 리왕조 마지막 왕자가 세운 성씨

중앙일보

매년 음력 3월 15일 열리는 리 왕조 창건 기념 축제. ‘덴도 축제’라고 불린다. 축제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화산이씨 후손들이 초청을 받아 참석한다. [사진 박순교 3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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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웬 대사는 이날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 화산 이씨 종택(이당고택)과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충효당 등 2곳을 각각 찾았다. 모두 화산 이씨(花山 李氏)와 관련된 장소들이다.

화산 이씨와 베트남과의 관계를 찾기 위해선 12세기 베트남 역사와 화산 이씨 시조인 이용상(1174~?·李龍祥·베트남어로 리롱떵)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용상은 1174년 베트남(당시 국명은 대월) 제6대 황제 영종의 7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는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이자 장기집권 왕조인 리(Ly) 왕조가 쇠퇴의 길을 걷던 시기다.

이용상의 조카인 혜종이 1210년 제8대 황제에 오른 뒤 리 왕조의 외척이었던 진수도(1194~1264·陳守度)가 국정을 위임 받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리 왕조의 몰락이 시작됐다. 진수도는 혜종의 딸을 임금에 앉힌 뒤 자신의 조카와 결혼시키고 왕위를 남편에게 넘기도록 하는 방식으로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왕조가 이씨에서 진씨로 넘어가면서 대규모 살육이 이뤄진다. 혜종의 장례식에 종친들과 왕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진수도가 황족의 피붙이들을 도륙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이씨 가문의 후손들은 대부분 멸족을 당했다.

이용상은 무자비한 숙청에서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1226년 이용상은 일족과 부하들을 데리고 바다로 도망쳤다. 그는 남송과 대만, 금나라, 몽골 등을 거쳐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포에 이르렀다. 그가 베트남 최초의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베트남 왕자가 표류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에선 크게 환영하며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화산 이씨 성씨도 조정이 하사했다.

대표적인 귀화성씨
필리핀계(145개)

골라낙촌치타, 궐랑로즈, 글로리아 알퀘아포스 등

일본계(139개)

함박 김씨, 우록 김씨, 도간 망절씨, 고전, 길강, 길성 등

중국계(83개)

밀양 당씨, 강릉 유씨, 평해 황씨, 제주 좌씨, 김해 해씨 등

기타(75개)

누구엔티수안(베트남계),

병영 남씨(네덜란드계), 남캉캉마(태국계)

투비악달(방글라데시계) 등

[자료 : 통계청]

중앙일보

화산 이씨 족보. 이용상이 중시조로 표기돼 있다. [중앙포토]


성씨를 하사 받은 이유에 대해선 주장이 엇갈린다. 지위가 높아 고려에 정착한 직후 바로 성씨를 받았을 것이란 주장과, 1253년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공을 세우면서 성씨를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당시 이용상의 나이가 80세에 이른 시점이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첫 번째 주장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화산 이씨는 2015년 기준으로 국내에 1237명이 살고 있다. 남자가 616명, 여자가 621명이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후손이 338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304명), 인천(209명), 경북(58명), 충북(45명) 등이 뒤를 잇는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11월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식 축하영상에서 이용상을 거론하며 한-베간 교류의 역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대사 발자취 따라 살펴본 이용상의 흔적

중앙일보

화산이씨 시조 이용상이 베트남(대월)에서 고려로 이동한 경로. [자료 박순교 3사관학교 교수]


응웬 대사는 지난 4일 아침부터 바쁜 하루를 보냈다. 이날 오전 7시10분 서울 베트남 대사관을 출발한 그는 10시40분 봉화군청에 도착해 박노욱 봉화군수와 이승영 회장 등 화산 이씨 종친회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점심을 먹은 후 충효당을 방문하고 영주시로 이동해 시청과 화산 이씨 종택을 찾았다. 이어 경북도청을 방문해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접견하고 다시 봉화군으로 돌아와 만산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응웬 대사의 이동 경로는 경북 북부지역 곳곳에 남은 베트남 왕조의 흔적을 찾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이용상과 그 후손들의 흔적을 살펴봤다. 『화산군 리용상』의 저자 박순교(54) 육군3사관학교 교수와 동행했다.

응웬 대사가 가장 먼저 찾은 충효당(문화재자료 제466호)은 리 왕조를 세운 이공온의 20세손이자 이용상의 13세손인 이장발(1574~92)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9세의 어린 나이로 전장에 달려가 문경새재에서 혈전 끝에 사망했다.

이장발은 죽기 직전 못다한 충효의 애절한 마음을 읊은 시를 남겼다. 백년 사직을 구할 계획을 갖고(百年存社稷)/6월에 갑옷을 입었네(六月着戎衣)/나라를 위한 근심에 몸은 비록 헛되이 죽고 말지만(憂國身空死)/홀로 계신 어머니 못 잊어 혼백만 외로이 돌아가네(思親魂獨歸).

중앙일보

응웬 부 뚜 주한베트남 대사(왼쪽에서 넷째) 일행이 지난 4일 경북 봉화군 창평리 충효당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충효당은 이용상의 13세손 이장발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사진 봉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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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인근엔 화산 이씨 후손 10여 명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장발의 16세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건(82)씨는 “베트남 대사가 방문해 충효당을 살펴본 것이 주민들에겐 무한한 영광”이라며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응웬 대사가 잃어버린 부분을 비로소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내친 김에 충효당 인근 야산에 위치한 이장발 묘소를 찾아 올라갔다. 길도 없는 산길에서 눈밭에 수 차례 미끄러지며 올라간 이장발 묘소에서 이건씨는 술과 음식을 올리며 절을 했다.

이어 찾은 곳은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에 위치한 화산 이씨 종택이었다. 화산 이씨 종택은 이용상의 22~23대손이 구한말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옥이다.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행랑채와 별채, 축사, 연자방아 시설 등을 갖춘 저택이었다고 한다.

박순교 교수는 “화산 이씨 종택은 화산 이씨 후손이 직접 지은 집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다. 그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라며 “지금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허물어지고 있어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화산 이씨 종택은 1930년대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성환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의 호를 따 ‘이당고택’으로도 불린다.

끝으로 응웬 대사가 하룻밤을 묵은 봉화군 만산고택(국가중요민속문화재 제279호)을 찾았다. 이곳은 화산 이씨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화산 이씨 후손들의 생활 본거지였던 춘양면에 위치해 있다. 조선 말기 문인 강용이 1878년(고종 15)에 지었다.

박 교수는 “춘양면은 이용상의 둘째 아들인 이일청부터 13세손 이장발까지 활동했던 주요 무대”라며 “응웬 대사가 이용상과 그의 후손들이 혼이 깃든 장소에서 묵었던 것”이라고 했다.

[S BOX] 귀화성씨 필리핀계가 1위
통계청의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2003년)에 따르면 한국에 존재하는 성씨는 모두 728개다. 이 중 기존에 있던 성씨가 286개, 외국인의 귀화로 새로 생긴 ‘귀화성씨’는 442개다.

귀화성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뜻밖에 필리핀계다. 궐랑로즈, 글로리아 알퀘아포스 등 국제결혼 등으로 귀화한 여성들의 성씨가 대부분으로 145개다.

그 다음은 일본계로 139개다. 고전(古田)씨, 길강(吉岡)씨처럼 일본 표기를 그대로 따온 성이나 우록 김씨(友鹿 金氏), 도간 망절씨(島間 網切氏) 등이 있다. 이어 중국계는 노(蘆)·무(武)·악(岳)·왕(汪)·장(藏)·초(焦) 등 83개다. 남캉캉마(태국계), 루비악달(방글라데시), 누그엔티수안(베트남계) 등도 눈에 띈다.

귀화성씨 중에서도 유래 깊은 성씨들이 있다. 진양 화씨(晋陽 化氏)는 명나라 때 들어온 성씨로, 시조 화명신이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개탄해 경주에 정착하면서 생겼다. 밀양 당씨(密陽 唐氏) 시조 당성은 원나라 말기 병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한 뒤 태조 이성계를 도운 공으로 성씨를 하사받았다.

일본계로는 함박 김씨(咸博 金氏)가 있다.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 장수 김성인(일본 이름 사조보·沙汝某)이 시조다. 그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正)의 좌부장이었지만 조선에 귀화했다.

네덜란드계 병영 남씨(兵營 南氏)는 네덜란드 선원 하멜의 일행 중 7명이 1663~66년 전라도에 정착해 조선 여인과 결혼한 뒤 당시 조선 효종으로부터 남씨 성을 하사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봉화·영주=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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