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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영원한 이방인`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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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곽덕준 작가가 자신의 그림 `위선자의 미소`(1967년)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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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돌아온 나는 물욕에 의지하는 대신 나라는 존재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인생의 증표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었다."

1963년, 23세의 곽덕준은 한쪽 폐를 거의 절제하고 병실에 누워 있었다. 3년에 걸쳐 투병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은 건 그림. 이 젊은 날 격투의 흔적이자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야 했던 어두운 청춘의 상징이 된 회화들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재일교포 작가 곽덕준(81)의 개인전 '1960년대 회화-살을 에는 듯한 시선'이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했다. 미디어,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작업을 선보여온 '악동 아티스트'가 결혼 후 아내에게조차 보여주지 않고 '봉인'했던 회화를 처음으로 공개한다. 1964년부터 단 5년간 작업한 54점이 걸렸다.

지난 9일 만난 작가는 "투병이 너무 힘들어서 내 안의 모든 걸 작품에 쏟아낸 것 같다. 그 시간이 없이 저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병실에서 창밖을 보면서 소묘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캔버스 위에 석고와 본드를 섞어 요철을 만들어 색을 입혔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린 동굴 벽화를 연상시킨다.

그는 "학교에서 일본화를 배워 서양화 기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일본화를 기본으로 나만의 오브제 회화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던 중에 도자기와 같은 질감을 구현하고 싶어 이런 기법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1층에 걸린 1964~1965년 작품은 투병 중 작업이라 색감이 어둡지만, 지하 1층과 2층에 걸린 그 이후 작품은 건강을 회복하면서 색이 점차 밝고 화려해진다. 작품을 '봉인'했던 이유에 대해선 "1970년대 들어 이미 매체가 다양해지고 버라이어티해진 세상에서 공개하면 제 작품 세계에 대한 오해가 있지 않을까 싶어 20년간 공개하지 않았다. 내 작품 세계에 회화를 통해 쌓은 깊은 이면이 있다는 걸 나중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과 무수히 등장하는 눈,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가득 찬 작품들은 마치 사회로부터 쫓기듯 살아온 작가 자신을 반영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반세기 동안 그의 정체성은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나의 예술 행위는 재일한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제외하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1960년대까지 고국을 방문한 적이 없던 그는 일본에서 살면서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원점을 알지 못하는 한 장님처럼 걸어다닌다는 의식이 있었다"면서 "부친의 고향인 경남 진주 등을 방문하고 뿌리를 확인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시절 뿌리를 찾는 과정이 회화 속에서 연결돼 녹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2월 18일까지.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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