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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단독] 준희 생일 케이크에 무너진 친부…'가면' 벗긴 형사의 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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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덕진경찰서 이형석 경위, 허점 파고들어 자백 받아내

친부, 딸 살아있는 것처럼 꾸미려 구매한 케이크에 '발목'

"딸에게 용서 구하는 길은 사건의 진실 완전히 밝히는 것"

중앙일보

'고준희양 실종 사건'이 친부 등에 의한 아동학대치사 및 사체 유기 사건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전주 덕진경찰서 이형석 경위. 친부가 범행을 자백한 진술녹화실에서 수사 당시 썼던 전단을 들어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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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믿습니까?’

다섯 살 고준희양 ‘실종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달 28일 오후 10시쯤 전주 덕진경찰서 진술녹화실. 준희양의 친부 고모(37)씨가 자신을 조사하던 강력3팀 이형석(48·경위) 형사에게 A4용지 한장을 요청했다. 그러곤 종이에 자신을 신뢰하는지 묻는 말을 적었다. 이어 이 형사에게 담배 한 대를 얻어 피운 고씨가 말문을 열었다. “준희를 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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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희양의 친부가 4일 전북 군산시 내초동 한 야산에서 열린 현장검증에서 준희양의 시신을 묻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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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딸을 학대해 숨지게 한 뒤 야산에 유기한 고씨가 내연녀 이모(36)씨, 이씨의 어머니 김모(62)씨와 촘촘하게 짠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8개월간의 추악한 연극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직후 고씨는 긴급체포가 됐고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고씨의 가면을 벗긴 주인공은 수사 초기부터 집요하게 그를 조사해온 22년 경력의 베테랑 이 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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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희양 실종 사건'이 친부 등에 의한 아동학대치사 및 사체 유기 사건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전주 덕진경찰서 이형석 경위.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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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자신의 학대로 지난해 4월 26일 숨진 딸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치밀하게 꾸민 뒤 12월 8일 실종 신고를 하며 완전 범죄를 기획한 고씨는 이 형사를 비롯한 수사팀이 모은 단서에 조금씩 무너졌다. 수사팀은 갑상샘 장애 등으로 몸이 불편한 준희양이 평소 기저귀를 찼던 사실을 탐문 수사로 파악했다. 고씨도 미처 챙기지 못한 연극의 허점이자 지지부진한 수사 상황에 대한 국민적 비난 속에서 얻어낸 성과였다. 이를 토대로 왜 4월 이후 기저귀를 구매한 내역이 없는지 추궁하자 허를 찔린 고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4월 29일 준희양을 포함한 온가족이 여행을 간 것처럼 꾸미고, 딸의 생일인 7월 22일에 맞춰 미역국까지 끓여 주변에 돌리는 등 연극을 해온 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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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에서 고준희(5)양이 실종된 지 31일째인 지난달 18일 오전 경찰과 소방대원, 군부대 등이 아중저수지에서 수색을 하고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고양은 실종 상태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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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단서는 생일 케이크였다. 고씨가 딸이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하려고 일부러 남긴 구매 내역이었다. 고씨는 “딸 생일 사흘 전 케이크를 사서 파티를 열어줬다”며 진술을 했지만, 실제 구매 시점은 생일 하루 전이었다. 이미 기저귀 문제로 당황해 내면에서 무너져가던 고씨가 준비했던 것과 다른 답변을 한 것이다. 이 형사의 추궁에 고씨는 ‘내연녀가 케이크를 하나 더 구매한 것 같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결백한 것처럼 보이려고 마련해놓은 장치에 결국 스스로 걸려든 것이다. “겨울이라 날도 점점 추워지는데 이제 그만 준희 데려오자”는 이 형사의 말에 고씨는 완전히 무너졌다.이번 사건의 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목격자가 없는 상태에서 고씨의 자백은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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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희양의 친부가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김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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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 유기’를 자백한 고씨가 가면을 벗은 직후 완전히 민얼굴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몸이 아픈 딸이 자신과 무관하게 죽자 시신을 묻기만 한 것처럼 진술했다. 이 과정에 끝없이 자백을 받아낸 사람도 이 형사였다. 진술 허점을 파고드는 이 형사에게 고씨는 이번에는 내연녀 이씨는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 했다. 이씨, 이씨의 어머니 김씨도 시나리오대로 똑같은 답변을 했다. 이 형사는 “겨우 하나를 알아내면 다음 시나리오를 토대로 연극을 계속 이어갔다”고 했다. 고씨도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것을 대비해 수사 진척 상황에 맞춰 진술할 내용을 각 단계별로 맞춰 미리 계획한 사실을 인정하듯 경찰 조사에서 ‘두 번째 플랜(계획)’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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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희양 실종 사건'이 친부 등에 의한 아동학대치사 및 사체 유기 사건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전주 덕진경찰서 이형석 경위.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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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첫째와 중학생 둘째 등 두 아들을 둔 이 형사는 다섯 살 준희양의 모습과 자녀들의 어린 시절이 오버랩돼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이번 수사에 뛰어들었다. 이 형사는 “20여일간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가고 쪽잠을 잤지만, 자식 키우는 아버지 마음으로 준희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동료들과 힘을 모았다”며 “사건의 전말을 어느 정도 밝힌 뒤에는 어린 준희가 얼마나 고통을 느꼈을지 생각이 들어 오히려 더욱 힘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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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희양의 친부가 현장검증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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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이 형사는 이번 사건이 친부 고씨와 내연녀의 주장처럼, 단순 실종 사건이길 바랐다고 한다. 적어도 '준희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어서다. 그래서 다른 사건과 달리 이번 사건은 해결하고도 무거운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8개월간 차가운 야산에 묻혀 있던 준희양의 시신을 찾아 한이라도 풀어주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이 형사는 “준희양이 친부와 내연녀의 학대로 숨진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 완전히 가려지진 않은 점에서 이번 사건의 퍼즐을 100% 맞추지 못한 상태로 검찰에 사건을 넘긴 것 같아 준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또 "수사를 지휘해준 수사과장님과 동료 강력팀 형사들이 없었다면 시신으로나마 준희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공을 돌렸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강력사건을 마주한 이 형사는 자신이 10차례 가까이 조사한 고씨에게는 “아버지로서 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길은 지금이라도 준희양이 어떻게 죽었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죗값을 받는 것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전주=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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