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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Law&Life] 판사 PC 강제개봉 임박… 기업선 직원 PC 열면 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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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비밀침해' 판례… 블랙리스트 조사 방식 갑론을박

검찰서도 "영장 없인 불가능"

조선일보

양은경 법조전문기자·변호사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재조사 중인 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판사 뒷조사 문건이 들어 있다는 의혹을 받는 법원행정처 컴퓨터를 쓴 판사들에게 최근 '동의하지 않아도 강제 개봉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둘러싼 법원 내 논란이 뜨겁다. 춘천지법 류영재 판사, 군산지원 차성안 판사는 지난 14일과 15일 법원 게시판에 '문제없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둘은 그동안 이 의혹 재조사를 요구해온 법관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다. 그러자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위법 소지가 있다'는 반박글을 올렸고, 이숙연 부산고법 판사도 안 된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이 논란의 쟁점은 판사가 쓰던 컴퓨터 파일을 해당 판사 동의 없이 강제로 열 수 있느냐다. 된다는 쪽은 "해당 컴퓨터가 공용이라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안 된다는 쪽은 "공용이라도 컴퓨터 파일엔 사적(私的)인 내용이 있을 수 있어 판사 동의 없이 함부로 열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비밀번호를 건 컴퓨터, 삭제한 파일을 함부로 여는 것은 형법상 비밀침해죄에 해당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비밀침해죄는 남의 편지 봉투를 함부로 뜯어 보거나 휴대전화 잠금장치를 푸는 경우 성립되는 범죄다.

이 논란은 일반 회사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컴퓨터를 마음대로 열어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법원이 명확히 판단한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해석상 '강제 개봉은 안 된다'고 본 사건이 있다.

2006년 서울의 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업체 대표이사가 영업차장이 회사 영업 비밀을 빼돌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업무용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떼어내 살펴본 일이 있었다. 대표이사가 비밀침해죄로 기소됐는데 대법원은 2009년 무죄를 확정했다. 그런데 그 취지는 '원칙적으론 위법이지만 예외적으로 허용된 경우'라는 것이었다. 문제의 영업차장은 입사할 때 '컴퓨터 내 모든 자료는 회사 소유'라는 약정서를 썼다고 한다. 여기에 회사 기밀을 빼돌린 구체적인 증거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예외적인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긴 했지만 그런 상황이 없다면 회사가 직원 컴퓨터를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다는 게 대법원 판결 취지였다는 것이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종종 사원 컴퓨터를 열어보고 싶다고 물어오는 기업들이 있는데 이 판례를 들어 안 된다고 만류하고 있다"고 했다.

검찰에서도 대체로 '안 된다'는 견해가 많다. 수사권이 있는 검찰에서도 비위 의혹이 제기된 검사를 감찰할 때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컴퓨터 파일을 강제로 열지 않는다고 한다. 꼭 필요한 경우엔 수사로 전환해 압수 수색 영장을 받아 강제 개봉한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해당 판사가 동의하지 않는데 영장 없이 판사 컴퓨터를 여는 것은 법 위반 소지가 크다"며 "이는 일반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양은경 법조전문기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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