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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슈탐색] 매서운 한파 속 거리 노숙인 방한용품은 '빈익빈 부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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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방한용품 위치·시간에 따라 '복불복'/ 침낭 여러개 받아 '되팔이'도 기승 / 서울시 "노숙인 수보다 넉넉히 준비했지만 고민 깊어"

세계일보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1호선 종각역 인근 거리에 한 노숙인이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다.


“침낭? 핫팩? 난 안주던데…”

영하권 추위로 칼바람이 불던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인근. 빈 건물 앞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이불을 덮고 누워있던 한 노숙인은 추위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괴로워했다. 자신을 45세라고 밝힌 이 노숙인은 2달 넘게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는 여러 겹 껴입은 옷과 이불 하나를 의지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봉사단체나 시로부터 방한용품을 받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런 거 없다”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던 할머니가 가져다준 이불이 전부”라고 힘없이 입을 뗐다. 그는 “보호시설이나 노숙인이 많은 역사 안에서도 잠시 생활해봤지만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며 홀로 거리에 누워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종로구 인근 거리에서는 침낭 등 방한용품 없이 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종각역 4번 출구 뒤편 거리에 누워있던 한 노숙인은 상자에 이불 하나만을 덮고 야외에 누워있었고, 광화문 방면 벤치에 누워있던 노숙인은 외투 하나에 의지해 칼바람을 이겨내야 했다.

곳곳에 한파특보가 발령되며 강추위가 본격화하는 요즘 이들 노숙인들은 저체온증, 동상 등 한랭 질환에 무방비로 노출 돼 있었다. 질병관리본부는 만 75세 이상 독거노인, 노숙인, 만성질환자 등을 한랭 질환 고위험계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예방·대처가 미흡하면 자칫 인명피해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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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중구 시청 지하 시민청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는 김모(59)씨. 김씨는 "역사 안에 대기하고 있어야 복지단체의 방한용품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추위를 피해 서울 중구 시청 지하 시민청에 들어온 노숙인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 역에서 노숙하고 있다는 서모(61)씨는 “겨울이 되자 각종 봉사단체에서 외투, 침낭, 핫팩 등 방한용품을 나눠줘 올 겨울 따뜻하게 보내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서씨가 가지고 다니는 쇼핑백과 가방은 6개에 달했다. 서씨는 “을지로 입구에는 20명가량의 노숙인이 생활하는데 봉사단체에서 받은 침낭을 2~3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20년째 노숙 중인 김모(56)씨도 “서울시, 구세군, 거리의 천사 등 노숙인 지원 단체에서 침낭, 핫팩 등 방한용품을 받아 부족하지 않다”며 “지금은 시청역에서 노숙하는데 봉사하는 사람들이 와 상담도 해주고 힘내라며 간식도 주고 간다”고 했다.

서울시는 올해 전체 노숙인 규모를 3241명이라고 파악했다. 이 중 2950명은 노숙인 요양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나머지 291명은 거리에서 지내는 노숙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서울시는 한파를 대비해 지난 10월 28일부터 노숙인 1인당 1개 원칙으로 침낭, 핫팩 등 방한용품을 나눠주고 있다.

서울시 자활지원과 관계자는 “지난해 침낭은 서울시 예산으로 마련된 500개와 복지 단체에서 마련한 침낭을 더해 총 1566개가 거리 노숙인을 위해 지급했다”며 “올해도 서울시는 지난해 남은 침낭과 함께 600개를 준비했고 이는 파악한 거리 노숙인 수보다 훨씬 많은 수량”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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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서모(61)씨의 생활용품들. 서울시와 복지단체로부터 받은 두꺼운 외투와 침낭, 핫팩 등이 담겨있다. 그는 누군가 훔쳐갈까 짐들을 이동할 때마다 들고 다닌다.


그런데도 거리 노숙인 사이에서는 방한용품 격차가 뚜렷했다. 2개월째 노숙 중인 정모(43)씨는 “방한용품을 받는 것은 ‘복불복’”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씨는 “노숙인이 한곳에 머무는 경우는 거의 없다”면서 “무료 배식을 찾아다니거나 편의점을 돌며 폐기 음식을 달라고 하는 사이 봉사단체가 잠깐 다녀가면 방한용품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0년째 거리를 떠돌며 노숙 중이라는 김모(48)씨는 “며칠 전 한 봉사단체에 방한용품을 받았는데 지금은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받아봤자 소용없다”면서 “나는 가방이 없어서 들고 다니지 못해 제자리에 놔둘 수밖에 없었는데 누가 다 훔쳐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일부 노숙인은 침낭을 받아 종로 탑골공원 인근이나 남대문시장에 4000원 정도에 팔고 있다”며 “내가 자는 곳 노숙자 중 반은 침낭이 있고 반은 아직 상자를 덮고 있는 상황”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노숙인 서씨는 “상자나 침낭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많아 을지로역에서는 교대로 짐을 지키고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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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노숙인. 그는 일어나자마자 가방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빨간 가방 어디있어!"를 외쳤다.


노숙인 출신으로 자립 후 상담 활동을 하는 김재남씨는 “자원봉사단체들이 서울 내 주요역사를 중심으로 노숙인 상담, 지원 등을 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소외된 노숙인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숙인 중 요양시설, 지하철 역사 등 단체생활을 피해 다니는 분도 상당 수 인데 이들은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해 추위에 떨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서울시도 고민이 깊다. 서울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인근에 있는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와 2·5호선 충정로역 인근 ‘브릿지 종합지원센터’에서 노숙인에게 방한용품을 나눠주고 있지만 취약계층이나 되팔아 수익을 남기려는 노숙인들이 찾아와 침낭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 관계자는 “노인 등 취약계층이 와 방한용품을 달라고 하면 안 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올해 준비한 침낭에는 시장에 되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울시’라는 문구를 새겼다”고 설명했다.

글·사진=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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