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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국민청원 게시판, 기업감시·자율정화 창구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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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하자니 일 커지고, 안하자니 인정하는 거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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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행위 의혹 제기부터 세무조사 요구까지. 요즘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은 기업과 관련된 문제를 청원하는 글로 뜨겁다. 청와대가 청원에 대해 공식 답변하는 조건이 ‘30일 동안 20만명 이상 추천’으로 다소 높은 탓에 아직 기업 청원이 답변의 대상이 된 적은 없지만 워낙 게시판을 주목하는 여론이 높다보니 20만명 이상 추천 여부와 상관없이 글이 올라간 것만으로도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기업들이다. 청와대가 민원성 게시판을 운영한 것은 과거에도 있던 일이고,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별로 유사한 기능을 가진 신고나 고발제도를 이미 운영 중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주목도가 높지는 않았다. 고발성 청원이 대부분이라 청원이 올라오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업 이름이 일단 부정적인 측면에서 오르내릴 수밖에 없어 그 자체만으로 부담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재계 일각에서는 ‘신종 리스크’라는 뒷말도 나온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기업의 부당한 횡포나 불공정행위에 맞서 일반 시민들도 손쉽게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반면 재계에서는 청원을 통해 사실관계가 다른 내용이 유포되거나 부정확한 정보가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12월 7일 청와대 게시판에는 국내 최대 웹툰 플랫폼 업체인 레진코믹스에 대해 “세무조사를 해달라”는 청원이 제기됐다. 기업 관련 청원 중에서도 세무조사를 요구하는 내용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작성자는 “레진코믹스가 해외에서 웹툰 서비스를 통해 거둔 수익을 불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면서 세무조사를 요구했다. 해당 서비스에 작품을 연재했던 모 작가가 2년간이나 해외 서비스 수익금을 정산받지 못한 게 의혹의 시작이었다.

이 사안은 본래 한 달여 전부터 웹툰 업계와 독자들 사이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해외 정산 문제를 놓고 당사자인 작가와 레진코믹스의 주장이 일부 엇갈리면서 진실게임 양상으로 사안이 번졌고, 결국 청와대 게시판에까지 청원이 오른 것이다. 이 청원은 일주일여 만에 5만명이 넘는 추천을 받았다. 기세대로라면 청와대의 답변 기준인 20만명을 넘길 가능성도 없지 않다. 20만명을 넘길 경우 요구대로 정부가 세무조사에 나설지가 관건이다.

한 중소기업의 폭로로 알려진 현대자동차의 기술탈취 의혹도 청원으로 등장했다. 작성자는 11월 27일 “기술탈취를 당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대형로펌을 상대로 대법원까지의 소송기간 7년을 버틸 수 없다”며 “수사기관이 조사해달라”고 주장했다. 작성자는 글에 등장하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어디인지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이미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이 됐던 중소기업 비제이씨와 현대자동차 간 문제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현대차의 협력사였던 비제이씨는 “현대차가 특허를 탈취해 유사한 다른 특허를 낸 뒤 계약을 해지해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국감에서 질의하기도 했지만 현대차가 “탈취한 사실이 없다”며 부인하고 나서면서 문제가 봉합되지 못했다. 자칫 묻힐 뻔했던 이 사안은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등장하면서 재차 주목을 받았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11월 24일 취임 직후 “대기업의 기술탈취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밝힌 지 사흘 만이었다.

사안이 다시 부각되자 비제이씨 등 중소기업 두 곳은 12월 5일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호소했다. 현대차가 재차 사실을 부인하자 이제는 여당이 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도 논평을 통해 “현대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기술탈취를 근절하겠다는 공정위와 중기부의 칼끝이 현대차를 향하게 될 것을 우려한 즉흥적 면피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최근 대규모 손실 사실과 유상증자 계획을 밝혀 논란이 된 삼성중공업 관련 청원도 올라와 있다. 삼성중공업은 12월 6일 오전 공시를 통해 “올해 손실이 4900억원으로 예상되고, 내년에도 적자가 예상돼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1조5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삼성중공업의 부실 고백 후 전날 주당 1만2000원 선에 형성됐던 삼성중공업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이에 자신을 소액주주라고 밝힌 삼성중공업의 한 주주는 “삼성중공업 박대영 사장이 공매도 세력과 결탁해 고의적으로 주가를 폭락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수사를 요청하는 청원을 낸 상태다. 이밖에도 편의점업계, 건설업계, 보험업계 등과 관련된 다수의 청원들이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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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에 오르내리는 기업들의 첫 반응은 대부분 “난감하다”로 압축된다. 통상 기업들은 기존에 있던 정부 기관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기업 관련 제보나 민원성 글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는 걸 암묵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일일이 대응하기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글들은 보통 여론의 큰 주목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대응을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도 숨어 있다.

하지만 국민청원 게시판에 등장하는 글들의 경우 역시나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귀신같이 언론에서 알고 먼저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해당 청원들이 답변의 기준을 넘지 못한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월 20일 회의에서 “참여 인원이 기준보다 적은 경우에도 관련 조치가 이뤄진 경우에는 조치를 성실하고 상세하게 알려달라”고 수석들에게 당부했다. ‘소수 의견’이라도 귀를 기울이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기업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응을 하자니 일을 키우는 것 같고, 안 하자니 해당 청원을 인정하는 거 같아 난감하다”며 “결국 대응을 한다고 해도 어쨌든 청와대에서 지켜보는 국민청원에 대놓고 반박하는 게 마치 국민청원 코너 자체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부담스럽기까지 하다”고 밝혔다.

기업들은 국민청원에 등장하는 글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나 부정확한 정보도 많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레진코믹스 관계자는 “해외 서비스 정산이 지금도 지체되고 있다는 청원글의 지적은 사실과 다르며, 현재는 정상적으로 정산 중”이라며 “해외에서 거둔 수익을 불투명하게 관리한다는 의혹 제기 역시 적자를 보고 있는 회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적”이라고 밝혔다.

현대차의 경우 비제이씨가 제기한 기술탈취 사실 자체가 없다며 펄쩍 뛰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비제이씨가 도용당했다고 주장하는 해당 특허는 회사와 경북대학교가 합작을 통해 개발한 특허로 비제이씨의 특허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며 “특허무효결정이 난 이유도 비제이씨의 특허를 탈취한 게 확인돼서가 아니라 특허를 부여하기에는 기존에 있던 다른 특허들에 비해 기술의 진보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삼성중공업도 청원글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해명에 나섰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사전에 모의 정황이 있다는 작성자의 주장과는 달리 실적 전망 관련 공시는 6일 주식시장이 개장하기 전 오전에 실시됐다”며 “사실과 다른 의혹이 제기되면서 벌써 여러 곳에서 사실확인 요청이 오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물론 부진한 실적 내용을 내년 초 공시에 밝혀도 되지만 이미 대규모 적자가 빤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를 발표하지 않고 미루다가 상황이 닥쳤을 때 공개하는 게 과연 옳은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레진코믹스, 현대차, 삼성중공업 관련 청원들은 공통점을 갖는다. 국민청원 게시판이 아니었다면 크게 공론화되지 않았을 사안들이라는 점이다. 국민 개인이나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맞서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이 약자를 보호하고 대기업을 감시하는 순기능을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 지방의 한 편의점주의 경우 경쟁업체의 편의점이 인접한 지역에 입점한다는 소식을 듣고 국민청원 게시판을 찾았고, 경쟁업체 측은 “아직 입점이 확정된 건 아니다”라며 “여러 주변 상황 등을 좀 더 고려해보겠다”고 밝혔다. 모 대기업의 경우 한 직원이 “주말도 없이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며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이에 해당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주문량이 많아 업무량이 늘다보니 피로를 호소하는 직원들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며 “초과근무에 따른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생산인력을 확충하는 등 근무여건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아직까지는 해당 기업과 이해관계가 얽힌 청원들이 주로 올라오고는 있지만, 다수의 기본권이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진짜 ‘청원’으로 제도가 활용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건설업계와 관련된 청원들 상당수는 건설·건축업계에 만연된 ‘주5일근무 비준수’ 문제를 호소하는 글들이다. 이런 글들에는 특정회사를 거론하며 부당함을 토로하기보다는 업계의 관행과 이를 등한시하는 정부당국의 느슨한 행정을 비판하고 노동자의 기본권을 찾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져 있다.

그럼에도 재계에서는 국민청원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아무래도 청원의 특성상 상당수의 글들이 기업에 부정적인 것들이 많은 데다, 진정한 청원 목적보다는 개인의 사익 추구나 기업 비방을 목적으로 한 글들이 게재되는 등 게시판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의 경우 ‘군대 내 위안부 창설 제안’ 등 이미 당초 제도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청원들이 올라오는 점에 대해 문제점이 지적된 바 있다. 제도가 알려질수록 기업 관련 청원에서도 이런 일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일단 청원이 제기되면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기업에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최대한 해명을 하고 대응을 한다 해도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는 청원으로 기업이 입는 이미지 훼손이나 매출 감소 등은 누구한테 보상받아야 하나”라고 말했다.

기업 관련 청원이 답변 기준을 통과한다고 해서 청원대로 조치가 이뤄질지도불명확하다. 예컨대 레진코믹스건만 해도 추천인 20만명을 넘긴다 한들 국세청이 실제로 세무조사에 나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세무전문가는 “법률에 따르면 세무조사는 정기세무조사가 아닌 이상 세금탈루 의혹이 명백해야 실시할 수 있다”며 “해당 청원만을 봤을 땐 회사가 명백하게 탈루를 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정부에 대한 신뢰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경로든 국민이 고통과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다는 건 긍정적인 부분”이라며 “청원을 통해 해당 사안이 공론화되는 과정 자체가 기업이나 업계의 자율적인 정화 노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훨씬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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