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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연중기획- 청춘에 희망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현실은 사회 부적응자 '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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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 포기해도 민간기업 취업 ‘장벽’… 한숨 짓는 장수생들 / 시험과목 정비 ‘호환성’ 제고 목소리

세계일보

“야, 대학 졸업해봐야 요즘에는 취직도 안 된다는데, 그냥 1∼2년 눈 딱 감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할까.”

지방의 한 국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송주현(가명·30)씨. 서울 노량진의 차가운 새벽공기가 폐포 깊숙이 스며드는 이맘때면 2012년 어느 겨울날이 생각난다. 2학기를 종강하던 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진로를 고민하던 같은 과 친구는 돌연 ‘공무원 시험(공시)’ 얘기를 꺼냈다.

“진로 결정과 취업 준비는 고민했지만 공시는 생각하지도 않을 때였어요. 친구 말을 듣다 보니 제법 구체적인 진로여서 처음으로 목표라는 게 생겼던 것 같아요. 9급 정도는 1∼2년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송씨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5년째 공무원에 도전하고 있는 ‘공시 장수생’이다. 노량진의 한 공무원 시험 관련 업체에 따르면 9급 공무원 시험의 평균 준비 기간은 2년 정도지만 3년을 넘어가는 사례도 많다. 4년을 넘어가면 ‘장수생’ 취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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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 고시학원에서 취업준비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뉴스1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나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면, 그날 그 친구를 안 만났다면, 몇 년 해보고 진즉 포기했더라면…. 지금은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제가 부족한 탓인데 말이에요.”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공시와의 질긴 ‘악연’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매번 합격선에서 맴도는 점수가 ‘희망 고문’을 이어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공시에만 매달리다 보니 다른 일을 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황이다. 게다가 최근 정부가 내년에 공무원 9475명을 더 뽑는 계획을 확정한 것도 그의 발목을 다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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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 민간 취업과는 ‘막다른 길’”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취업난이 이어지면서 공무원 시험 열풍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과 인턴, 계약직, 명예퇴직 등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취업 전선에서 청년들에게는 정년과 육아휴직, 연금 등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업이 유일한 돌파구로 자리 잡은 탓이다.

13일 행정안전부와 인사혁신처 등에 따르면 올해 2월 접수했던 9급 국가공무원 공채 시험에는 4910명 선발에 역대 최다 인원인 22만8368명이 몰렸다. 평균경쟁률은 46.5대 1이다. 선발 인원이 늘면서 경쟁률은 지난해 53.8대 1보다 다소 감소했지만 응시자는 6500여명 더 늘었다. 올해 9급 지방공무원 시험에도 역대 최대 인원이 몰렸다. 서울시 9급 공무원 공채의 평균경쟁률은 84대 1에 달했다. 최근 필기시험 합격자를 발표한 생활안전분야 7급·9급 국가공무원 공채 시험의 평균경쟁률은 247.5대 1이었다. 특히 9급의 경우 301.9대 1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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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인원도 많다는 의미다. 이 가운데는 송씨처럼 장수생이 되는 경우도 적잖다. 지난 9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재정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이 인사혁신처와 함께 최근 3년 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국가공무원 106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무원 시험 준비 관련 설문조사를 보면 전체의 5.3%는 5년 이상 공시에 매달렸다. 준비 기간이 4년 이상∼5년 미만이 6.0%, 3년 이상 4년 미만도 6.2%로 비슷했다. 9급 공채 일반행정직 합격까지 12년을 준비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합격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여서 실제 장수생의 비율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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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공시생들이 오랜 기간 공시 준비에만 매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중도에 포기하더라도 일반 기업 취직 등 다른 분야의 사회진출이 쉽지 않아서다. 가장 많은 수험생이 지원하는 9급 일반행정직 공무원의 경우 필기시험에서 국어와 영어, 한국사를 필수공통 과목으로 치르고, 행정법총론과 행정학개론, 사회, 수학, 과학 중 2과목을 선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기업 취직에 필요한 학점과 토익 점수, 자격증, 인턴 경험, 대외활동 등 ‘스펙 쌓기’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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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실시된 2017년도 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채용 면접시험에서 응시자들이 면접장으로 향하고 있다.뉴스1


◆공시-민간 취업 간격, 어떻게 좁힐까

인사혁신처는 공무원과 민간 채용의 호환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로 올해부터 7급 공무원 필기시험의 영어 과목은 토익과 토플 등으로 대체했다. 이와 함께 현재 5급 공무원의 필기시험 등에 활용되는 공직적격성평가(PSAT) 시험을 7급 공무원 시험에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PSAT는 언어논리와 자료 해석, 상황판단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대기업 등의 채용 과정에서 실시하고 있는 직무적성평가 등과도 호환이 가능하다.

지엽적인 출제경향과 단순 암기를 요구하는 시험 문제 구성에 대한 개선 요구도 높다. 자유한국당 황영철 의원실에서 공시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채용 필기시험에 대한 공시생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4.3점에 불과했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342명은 공무원 채용 필기시험에서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로는 ‘지엽적인 문제출제 경향’(33.6%), ‘단순 암기를 요구하는 문제’(20.7%), ‘업무와 연관성 없는 문제 출제’(18.7%)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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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 이창기 교수(행정학)는 “행정학과 행정법을 필수과목으로 정하고 2차 시험에 PSAT를 도입한다면 민간의 인·적성 시험과 연관성도 높이면서 공직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희대 강제상 교수(행정학)는 “순발력보다 사고력과 공공성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을 고민해야 한다”며 “교원임용시험처럼 서술형 과목을 도입하거나 면접을 강화해 예비 공직자로서 윤리의식과 공공의 가치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300개가 넘는 5∼9급 국가공무원 공개채용 과목 수를 줄여 수험생 부담을 완화하면서 직무에 기반을 둔 평가 방법을 마련해 민간 분야의 채용 방식과 호환성을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우·이창훈 기자 woo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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